오송 옹기가마터 시굴조사 못하고 헐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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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 옹기가마터 시굴조사 못하고 헐리나?
  • 권혁상 기자
  • 승인 2016.03.16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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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환 옹기장 “보존여론 무시, 행정대집행 철거 시도”
충북개발공사 “박 옹기장측 동의거부, 시굴조사 못해”
▲ 행정대집행 철거위기에 처한 오송 옹기가마터와 무형문화재 전수자인 박성일씨.
/ 육성준 기자 eyeman@cbinews.co.kr

보존과 개발의 논란속에 5년간 공방을 벌여온 청주 오송 봉산리 옹기가마터가 행정대집행으로 강제철거될 상황에 처하게 됐다. 사업추진을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충북개발공사는 청주지법에 ‘토지 및 지장물인도 등 단행 가처분 신청’을 낸 상태다. 옹기가마를 운영해온 도무형문화재 박재환 옹기장(79)측은 집행정지를 요청하는 반소를 제기했다. 충북개발공사는 2014년 10월 강제 현장 감정평가를 실시해 지장물에 대한 건물 및 이전보상으로 5억3천만원을 책정했다. 따라서 박 옹기장측은 법리상으로 보상가에 반대하며 재평가를 요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문제는 옹기가마터의 문화재적 가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은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 10월 본보 보도당시 충북개발공사와 박 옹기장측은 시굴조사 진행에 합의한 상태였다. 당시 상황을 정리해 보면 애초 개발지구내 지표조사에서 봉산리 옹기가마터는 시굴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역 문화계와 시민사회단체가 보존 필요성을 제기하자 문화재청이 개입해 가마터에 대한 시굴조사를 시행자에 지시했다.

▲ 200년 역사의 봉산리 옹기가마터에서 제작된 옹기들.

이전비용만 6억원, 보상가는 5억3천만원

이에따라 박 옹기장측과 충북개발공사간 시굴조사에 합의했지만 시굴업체 선정에 이견이 생겼다. 박 옹기장측은 40년전 현장 방문조사를 한 적 있는 D문화재연구원을 조사업체로 추천했다. 충북개발공사는 조달청 공개경쟁을 통해 용역업체를 선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양측의 줄다리기 속에 D문화재연구원은 조사용역을 맡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게 된다. 그렇다면 조달청을 통한 용역업체 선정 수순을 밟으면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큰 걸림돌이 등장했다. 시굴조사를 위해서는 시행사가 토지와 지장물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거나 소유주의 동의를 받아야 가능하다. 하지만 그 시점에 충북개발공사의 보상업무 담당부서에서 봉산리 가마터에 대한 현장 감정평가를 강행한 것. 박 옹기장이 몸소 나서 막았지만 직원들에게 제지당했고 강제적인(?) 감정평가가 실시된 것. 결국 정면충돌 양상이 벌어지면서 시굴조사에 대한 논의는 이후 중단되고 말았다. 양측은 가장 중요한 절차를 남겨둔채 다시 1년 5개월간 공회전한 셈이다.

무형문화재 박 옹기장의 3남인 박성일 전수자는 “사전에 예고도 없이 힘으로 밀어부쳐 감정평가를 실시했다. 아버님은 몸으로 막다 실신해 병원치료도 받으셨다. 앞에선 시굴조사 협의하자더니 뒤에선 강제로 감정평가를 강행했다. 지방공기업에서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는데 어떻게 더이상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고 항변했다.

충북개발공사측은 “시굴조사는 현재 지장물(옹기가마)을 철거해야만 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박씨측은 보상가에 반발해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물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할 것이다. 결국 시굴조사 동의를 하지 못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행정대집행이 이뤄지고 토지 소유권이 넘어오면 시굴조사는 진행할 것이다. 문화재청에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 의무사항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전수자 박씨는 충북개발공사의 보상평가액 5억3천만원도 실제 가마 이전건립 비용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전문업체에 견적의뢰해보니 현재 규모의 가마를 새로 만드는 데만 6억원이 소요된다. 토지 매입비와 개발부담금 등 기타 비용을 감안하면 턱도 없는 보상가다. 공원부지에 최소한의 면적인 600㎡ 만 확보하면 가마가 보존되는데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충북개발공사측은 “현실적으로 보존여부는 전문가들의 조사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굴조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박씨측에서 동의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유형문화재가 아닌 무형문화재는 기술보유자이기 때문에 시설 자체는 이전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보존 여부에 대한 판단을 받고 싶으면 시굴조사에 먼저 응하는 게 순서”라고 말했다.

시굴조사 응하면 가마훼손 ‘딜레마’

결국 박 옹기장측은 ‘딜레머’에 빠진 셈이다. 시굴조사를 통해 보존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법원의 행정대집행 결정을 막기 힘든 처지다. 반대로 시굴조사에 동의하면 시행사의 일방적인 보상평가액을 사실상 수용하는 꼴이 되고 만다. 지장물인 옹기가마가 없어지면 재평가를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 역사문화계 인사들은 전수자인 아들까지 7대에 걸쳐 200년간 가마터를 유지해 온 역사성을 내세워 옹기가마 보존을 주장하고 있다. 2010년 국내 최대 규모의 울산세계옹기문화엑스포 축제가 열렸다. 당시 박재환 옹기장은 광고 모델로 선정됐다. 봉산리 옹기 가마 앞에서 가마 불을 지피며 엑스포 성화 불을 붙이는 장면을 연출했다. 세계 옹기축제의 성화를 지폈던 옹기장이 정작 고향에서 등떠밀린 모양새가 됐다. 보존과 개발의 숱한 다툼에서, 미래와 현재의 저울질에서 미래의 손을 들어줄 때는 과연 언제일까.

봉산리 옹기가마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200년전 천주교 박해 때 옹기촌 조성, 1930년대 청주 최대 ‘벌미공소’

박재환 옹기장의 6대조 박예진은 200년전 천주교 박해를 피해 오송에 숨어들어 옹기를 굽기 시작했다. 이후 다른 신도들도 모여들면서 1890년 프랑스 선교사가 벌미 공소(公所)를 설치했다. 기록에 따르면 1933년 신도수가 258명에 달해 주변의 옥산 신촌공소(55명) 강내 사곡공소(54명)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 따라서 벌미 공소 주변의 옹기점도 100여개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다는 것. 해방이후에는 노기남 대주교가 벌미공소에 직접 내려와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는 것.

하지만 개량가마를 통한 대규모 생산공장이 들어서면서 전통가마는 위기를 맞게 됐고 박 옹기장은 1969년 고향을 떠나 잠시 인천의 옹기점에서 일하게 된다. 2년만에 돌아온 박 옹기장은 200년간 이어온 옹기가마에 칠기가마시설을 접합한 복합식 개량가마를 설치하게 된다. 문화재적 측면에서 이때 전통가마의 원형이 일부 변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난 2014년 1월 봉산리 옹기가마는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에 선정돼 내셔널트러스트상을 받았다. 제11회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보전대상 시민공모전에서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선정 이유는 일대에 흙이 좋은 점토가 있어 옹기촌이 형성되어 200년간 선대의 맥을 이은 가마라는 점이 손꼽혔다. 또한 천주교의 시대적 산물인 질곡 많은 교우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장소로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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