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그녀 이야기 <제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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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녀 이야기 <제50회>
  • 이상훈
  • 승인 2004.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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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구신화쉰번째이야기
"으음... 아무튼 일이 이쯤 되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감평뜰성을 찾아가 그곳 성주님께 사정하듯이 잘 말씀드려봐야겠소. 우락성 성주님의 뜻이 대강 이러이러하니 들꽃님이를 다시 내어줄 수는 없느냐고....”

촌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저혼자 중얼거리듯이 그러나 모두들 알아들으라는듯이 말했다.

“아니, 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갑자기 범삭이가 성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으응?”

모두들 깜짝 놀라 범삭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왜 들꽃님이를 자꾸만 괴롭힙니까? 여자가 예쁘게 태어난 것도 죄입니까? 들꽃님이도 사람이에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제발 사람답게 살게좀 해주자구요!”

범삭이는 울먹이며 이렇게 항변하듯이 말하다가 마침내 쿡하고 울음을 크게 터뜨렸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안쓰러워하면서도 슬금슬금 촌장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으음음...'

촌장의 표정은 역시 예상했던대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실 촌장의 앞에서 감히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거역으로서 자기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아주 위험천만한 일!
하지만 범삭이는 이곳 촌장 가문과 아주 묘한 인척 관계에 놓여있었다. 그러기에 그 나름대로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 이렇게 겁없이 한번 떠들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촌장은 잠시 속으로 분을 삭이듯 두 눈을 내리 감고있다가 번쩍 다시 뜨며 범삭이를 향해 말했다.

“얘야! 나도 네 심정을 잘 안단다. 지금 우리 마을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한지도 잘 알고있고... 하지만 어쩌겠니? 인구는 적고 땅은 좁고 그러다보니 우리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있는 젊은 장정들의 숫자도 적지 않으냐? 커다란 호수에서 작고 힘이 없는 물고기들은 힘센 물고기들과 직접 마주치지 않도록 아예 피해다니거나 친한척 굴어야만 겨우 살아갈 수있듯이 우리 보랑말 사람들이 힘센 부락 사람들 틈에 끼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곳저곳 비위를 맞춰줘가며 살아가야지 뭐 별수 있겠냐?”

촌장은 모든 자존심을 내팽개치듯 이렇게 솔직히 말하고 나서도 자신의 처지가 몹시 한심스럽고 안타까운지 애꿎은 한숨을 길게 푹푹 몰아내쉬었다.

‘으흑흑흑....’

마침내 범삭이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크게 울부짖으며 어디론가 어둠속으로 뛰어가버렸다.

“여우리! 어때? 이제 우리도 웬만하면 자리를 뜨도록 하지?”

벌구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어 여우리에게 말했다.

“음. 그게 좋겠어요. 지금 사람들의 시선과 맘이 딴 곳으로 모두 쏠려있을 때 얼른....”

여우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어둠속으로 몰래 빠져나가 버렸다.

“여우리!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내일 어때?”

어느새 다가온 벌구가 여우리에게 물었다.

“어머! 내 이야기를 마저 다 듣겠다면서?”

‘아, 참! 그런가? 그럼....“

“일단 우리 집으로 날 데려가줘요. 자!”

여우리는 이렇게 말하며 또다시 벌구의 등에 업히겠다는 자세를 취해보였다.

“어허! 아니, 이 처녀좀 보게! 툭탁하면 틈만 있으면 사내 등에 업히려고드네! 하기야 뭐 나로선 굳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만....”

벌구는 이렇게 말하며 뒤로 얼른 돌아서 널쩍한 등판을 여우리에게 바짝 들이밀었다.
여우리는 또다시 벌구의 등에 덥썩 안기면서 그의 귀에 대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감칠맛나게 속삭였다.

“부전자전이라고... 옛날 아버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벌구님도 처녀를 업고 달릴 때 예의를 갖춰줄 걸로 난 굳게 믿어요. 자, 어서!”

여우리는 어서 빨리 달리기 시작하라는 뜻에서인지 벌구의 뺨 한쪽을 가볍게 찰싹찰싹 때려주었다.

“어? 어? 아니, 이 여자좀 봐! 말 잔등 갈기듯이 사내 뺨을 두들겨 대다니!”

벌구가 다소 어이가 없어하는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보며 말했다.

“어서 빨리 달리기나해요. 아까 제가 하다만 얘기를 마저다 해드릴터이니....”

여우리는 벌구에게 공짜로 업히는 것에 대한 댓가를 치러주기위해서인지 풍만한 자기 두젖가슴을 벌구의 등판에다 짓뭉개듯이 바짝 밀착시켜주며 두 팔로 그의 목을 꼬옥 감싸 안았다.

“으음음... 알았어요! 내 딱 이번 한번만 이렇게 업고 달려주지요.”

또다시 벌구는 여우리를 등에 업은 채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달려가는 목표 지점은 여우리가 사는 집.
겉으로는 거의 흉가나 폐허처럼 보여지는 여우리의 위장된 집이었다.

“아, 그런데... 제가 듣고싶은 얘기를 해주실래요?"

그녀를 업고 달리던 벌구가 슬며시 물었다.

"그러지요. 그런데 아까 내가 어디까지 했지요?”

"아, 그거보다도... 아까, 범삭이가 말했던 들꽃님인가 하는 아주 예쁜 처녀 얘기 말이오."

"어머머! 그게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럼요. 그거 꼭 알고 싶은데...."

잠시 여우리의 말이 끊어졌다. 벌구는 갑자기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지금 시샘을 하고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왜요? 말하기가 곤란해요?"

"아니, 말하기 곤란하다기 보다는요. 어차피 제가 하려던 얘기를 계속 듣다보면 저절로 다 알 수가 있다구요."

"알았어요. 그럼 아까 하시던 얘기 계속 이어주시지요."

"그래요. 그런데... 어디까지 제가 얘기를 했었지요?"

"으음.... 글쎄....그건 나도 확실히 잘 모르겠네? 얘기를 하고 듣던 도중 너무 자주 끊기다보니..”

벌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이제 생각났어요. 그 못생기고 심술맞은 하늘말촌 촌장딸이 벌구 아버님과 그 여자분을 본격적으로 괴롭히는 데까지 얘기를 했네요. 그때 세호라는 분이 아버님 부부를 도와드렸다는 것까지... 벌구님! 그렇지요?”

여우리가 이에 대해 확인이라도 받아보려는듯 벌구의 귀에 입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으음.... 아마, 그럴 거에요.”

“네. 아무튼 그 세호라는 분은 벌구 아버님을 자기 무예 사부님으로 모시기로 단단히 작정하였대요. 그래서 틈만 나면 벌구 아버님을 찾아와 무예에 대해 서로 논하기도 하시고 또 실제 연습을 함께 해보기도 하고...‘

“.....”

“하지만 하늘말촌장의 못난이 딸은 이 두 분에 대한 복수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여기저기 수소문해가지고 상당한 무예 기량을 갖고있는 고수 8명을 마침내 찾아냈으니까요.”

“아니, 여덟명씩이나?”

“그래요. 이들을 한꺼번에 보낸다면 제아무리 무예 솜씨가 뛰어난 벌구 아버님이라 할지라도 별 수 없을거라는 생각에서였죠. 그래서, 어느날 새벽.... 동이 막 트기 시작할 무렵 이 여덟명의 고수들을 벌구 아버님께서 사시는 곳으로 한꺼번에 모두 찾아가게 했어요. 쉽게 말해서 두 분이 달콤한 꿈속에 빠져있을 시간에 별안간 기습을 하도록 한 것이죠.”

“그, 그래서요?”

“벌구님! 잠깐만요! 그러다보니 어느새 저의 집에 다 와버렸잖아요? 호호... 참 빠르긴 빠르네요! 자, 어서 내려주세요.”

여우리의 말에 벌구는 그녀의 통통한 엉덩짝을 가볍게 철썩 두들겨 보며 얼른 내려주었다.

“어머머! 쳤, 쳤어요? 감히 처녀의 엉덩이를... 지금 어디에다 감히 손찌검을 하신거지요?”

여우리가 엉거주춤 내려서는 즉시 두 눈을 흘기며 벌구를 노려보았다.

“아, 나는 기껏 업어주고 달리면서도 얼떨결에 뺨을 얻어맞지 않았소? 나로서도 뭔가 좀 남는 게 있어야지....”

벌구는 이렇게 말하며 조금 쑥스러운듯 슬그머니 딴곳을 쳐다보았다.
이때, 폐허같은 그녀의 집을 지키던 개가 별안간 뛰쳐나와 벌구를 향해 요란히 짖어댔다. 아마도 자기 주인(여우리)에게 무례한 짓을 한 벌구를 대신해서 꾸짖어주려는 것 같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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