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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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하는 여인
  • 김명기
  • 승인 2005.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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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학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가 6:20~23)

로마제국시대에 박해로 숨진 성녀 루시아가 있었다. 로마인들에게 잡혀온 루시아는 배교(背敎)하면 살려준다는 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단호했다. 루시아는 죽을지언정 배교할 수 없다며 그들의 회유와 협박을 물리쳤다.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킨 루시아에게 로마인들은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성녀 루시아의 두 눈을 뽑아 은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은쟁반에 올려진 루시아의 두 눈에선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권학실씨(62·루시아)는 그런 성녀 루시아의 삶을 좇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죽을 때 안구 기증을 할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의 두 눈은 심각한 약시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형체를 거의 알아보지 못 할 지경이고, 색깔도 검은 계열이면 구분조차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인생에 한 땀 한 땀 아름다운 수를 놓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름다운 수를 놓고 있는 권씨의 모습은 세상 어느 것 보다도 숙연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권씨가 수를 놓는 것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손놀림 빠른 이들이야 조끼 하나 뜨는데 2~3일이면 족할 테지만, 권씨에게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손을 제대로 놀릴 수 없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제멋대로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아무 곳이나 향한 손가락은 류머티스 관절염의 후유증 때문이다. 그러나 권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끼며 스웨터며 모자며 허리띠며 묵주주머니를 뜬다.

그러니까 권씨가 움직이기 힘든 손목과 손가락으로 대바늘을 놀리며 한 올 한 올 정성껏 수를 놓고 여러 잡동사니를 뜨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기도와도 같은 것이다. 그녀는 그것들을 뜨면서 삶을 반추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고 작은 소망을 빌기 때문이다. 그 한 올 한 올마다 정성을 담아 꽃동네가족들에게 사랑의 선물로 다시금 드리기 때문이다.

권씨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다. 정신병력까지 겪었던 그녀가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농삼아 어떤 이들은 이름탓으로 그런 것이 아니냐고 한다. 이름이 ‘학실’이니, 경상도 발음으로 치면 ‘확실’을 ‘학실’로 확실하게 발음할 것일테니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름의 힘을 빌어 ‘학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가령 권씨의 기억은 이런 것이다. 두 살 때 오이 두 개를 먹은 기억이 나요. 네 살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다섯 살 때 엄마는 명주를 짜서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를 해줬는데, 너무 좋아 부엌까지 입고 다니다 홀랑 불타서 된통 혼났어요. 그때 살던 집은 ㄴ자 집이었어요. 덧붙이면 유년시절이 지난 이후의 기억은 정확하게 날짜와 시간까지 그녀는 기억해내고 있다. 권씨가 기억해내고 있는 그 날짜와 시간들이 이 글에 큰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녀의 기억이 진짜 정확한 것인지 진위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여하튼 그 기억력은 참 대단한 것이다.

그녀의 그 정확한 기억력을 되짚어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권씨의 어머니는 만주서 살다 열두 살 때 민며느리로 들어왔었다 한다. 권씨가 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몹시 앓았는데, 알고보니 그것은 강신(降神_)때문이었다. 이후 ‘무당 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권씨는 그 말이 너무도 싫었다 한다.

“시퍼런 쌍작두를 타는 어머니를 보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어요. 그보다도 내림굿으로 무당이 된 어머니가 싫기도 했구요.”

권씨는 열여덟에 결혼했다. 강원도 갈말로 시집을 갔는데 불도저 운전수였던 남편의 사랑이 끔찍했다고. 그러나 남편의 성격이 너무 호인이라 집에 끼니가 없어도 그저 ‘허허’하고 넘겨버리는, 경제적으로는 약간의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는 위인이었다. 하여 땔감이나 잡스런 집안 일은 권씨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행복했노라 권씨는 말한다.

“71년도였는데, 남편의 생일을 이틀 앞두고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 남편은 광산 일을 다니고 있었는데, 갱도에 들어가 ‘마끼(돌 실어 올리는 엘리베이터 식의 기계)’를 타고 올라오다가 위에서 떨어진 돌에 맞아 절명했다는 거예요. 안전모를 썼는데도 말이죠. 믿기지가 않더군요. 주위 사람들은 저에게 안 보이고 염을 하려 했어요. 그래서 전 펄쩍 뛰었죠. 마지막 가는 길인데 나한테 안 보이면 사흘이 아니라 3년이 지나도 염 못 한다고 말이죠. 그래 사람들이 죽은 남편의 발을 보여주고 손을 보여주고 팔을 보여주고 어깨까지 보여주는데 얼굴을 안 보여주는 거예요. 얼굴을 안 보고 어떻게 보냅니까. 결국 보니까 골은 다 빠져나가고 머리껍질만 남아있는 형국이더군요. 끔찍했어요. 엉엉 울었어요. 어찌된 사람이 자기 생일날 출상(出喪) 하느냐고.”

남편과 금슬이 좋았고 권씨라면 끔찍이도 사랑해주던 이였기에 권씨의 슬픔은 더욱 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저 세상으로 떠난 해 여름, 장마에 집까지 유실되는 일이 벌어졌다. 참 허망한 세상이었다. 자식 하나 못 낳았는데, 그 양반 나한테 구박 한 번 하지 않은 양반인데, 지금도 또렷하게 얼굴이 떠오르는 분인데.

“꽃동네 와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그분을 위해 기도 드려요.”

1976년 5월 8일, 권씨는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친정살이를 하고 있다가 중매로 결혼한 것이었는데, 결혼상대 집안이 참 가관이었다. 두 번째 남편될 사람은 첫 번째 부인이 아들 하나 낳고 도망가고, 두 번째 부인이 아들 둘 낳고 도망간 상태라 배다른 아들 셋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세 번째 부인이었던 거죠. 두 번째 남편도 자상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신랑은 좋은데 시어머니의 이간질 때문에 하루도 바람잘 날이 없는 거예요. 고부 갈등이 결국 부부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죠.”

‘밥투정은 하루 아침, 사랑투정은 사흘 아침’이라는 말처럼, 권씨와 남편의 갈등은 ‘사랑투정’이었다. 1982년 6월에 권씨는 개신교 신자가 됐다. ‘내 영혼이~’로 시작되는 찬송가 469장을 권씨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찬송가는 권씨가 교회에 처음 나가면서 알게 된 찬송가인 까닭이다. 그 감동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 다녀오면 찬송가 외에는 생각할 염도 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다녔죠. 그런 나를 남편은 답답하게 여기곤 했어요. 하루는 참다못한 남편이 그러더군요. ‘하느님하고 잘 살아봐라.’ 그러고는 나가버렸어요.”

그런데 그런 권씨에게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이었다. 그 놈은 얼마나 지독한 지 온몸을 비비 꼬이게 만들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증에 시달리게 했다. 입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84년이었다. 앉으려 해도 아파서 앉을 수가 없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듯도 했다가, 척추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 해지기도 했다. 결국 권씨는 말죽거리 청계산 기도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의 믿음이 신통했던 탓인지 금식기도 20일 동안 물만 먹고나니 몸이 가뿐해졌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이어 그녀에게 또 다른 불행이 닥쳤다. 조울증이었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퇴원했다.

그러나 류머티스 관절염이란 것이 금식기도 한 번 한다고 깨끗하게 낫게 될 호락호락한 놈은 결코 아니었다. 금식기도를 통해 얼마간 호전을 보인 것은 권씨가 기도를 통해 가졌던 믿음이 컸기 때문에 생긴 심리적 요인은 아니었을지. 권씨는 1993년 7월 8일 관절염이 재발돼 입원하게 됐다.

“집에서 쓰러져 한 달간 누워 있는데 이미 산 사람이라 보기가 힘든 지경이었죠. 욕창은 심해져 몸 속으로 그 썩은 기운을 뻗쳐가고 있고, 사지는 비틀리고, 온몸의 힘은 점점 빠지고…… 오늘내일 하면서도 생명줄이 얼마나 질긴지 숨이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보훈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죠.”

오랜 투병생활로 그녀는 많은 약을 먹어야 했다. 그 후유증으로 그녀의 치아는 망가질대로 망가졌다. 윗니 아랫니 할것없이 권씨의 치아는 심한 뻐드렁니로 돼 있다. 보통사람의 치아가 90도 가까운 각도를 유지 하는데 비해 그녀는 30도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웃니 아랫니가 입술 쪽으로 심하게 돌출돼 있다. 치아와 치아의 틈새도 심하게 벌어져 있고, 금세 모두 호루룩 따 빠질 듯 덜렁덜렁 흔들린다. 틀니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무슨 욕심이 있다고, 시덥잖아도 틀니보다는 내 이빨 그대로 저 세상으로 가져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몇 번의 효험으로 그녀는 금식기도에 대한 근거없는 맹목적 믿음을 갖고 있다. 금식기도를 통해 류머티스 관절염이 완치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어찌보면 예순둘을 살아오면서 쌓아온 그녀의 그런 ‘부당한’ 믿음을 새롭게 교정시켜 줄 필요는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 믿음 하나로 권씨는 늘 희망을 갖고 있고, 행복해 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퇴원한 후 남편의 폭행이 시작됐다.

“1993년 12월 28일이었어요. 미아리 성모복지병원에서 퇴원했는데, 시어머니 이간질에 남편의 무지막지한 폭행이 시작된 거였죠. 그때 제 몸이 어땠는지 알아요? 오랜 투병생활로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지고, 젖무덤조차 없었어요. 젖꼭지만 달랑 남아 있는 그런 형국인데, 남편의 폭행은 정말 견디기 힘들더군요.”

   
그러나 미우나 고우나 남편이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하나의 마음의 지주가 굳건히 서 있는 것이었다. 그 남편조차 1997년 10월 12일 심장마비로 작고하자 이제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를 보호해줄 어떤 방패막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편이 죽고 이듬해인 1998년 1월 9일 권씨가 키운 아이들이 권씨를 꽃동네로 데려왔다. 병원에 데려다 준다고 속이고는 꽃동네에 입소시킨 것이었다.

“안 서운했어요. 지들도 지들 살아갈 걱정이 컸기 때문이었겠죠. 어쨌든 제가 꽃동네에 들어와서 새 삶을 얻었고, 매일처럼 열심히 기도드릴 수 있게 됐으니, 그것이 축복 아니겠어요?”

권씨는 오늘도 뜨개질을 한다.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하며 권씨는 자신의 선물을 건네줄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문양을 새겨넣고 품성을 생각하며 사랑을 새겨넣는다. 문양 하나 넣는 데도 허튼 일이 없어, 꼭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야 새겨 넣는다. 시력이 좋지 않아 돋보기 없이는 도무지 뜨개질을 할 수 없고, 상대방조차 알아보질 못 한다.

“오른손은 움직이질 못 해요. 제 역할을 하지 못 하는 놈, 음식 하나 집어보질 못 하죠. 왼손은 조금은 움직일 수 있어요. 조금 나은 놈이 아예 못난 놈에게 제 역할을 찾아주는 게 뜨개질이죠. 오른손은 가만히 대고만 있어도 왼손이 다 해주거든요. 하지만 가만히 대고만 있는 오른손이 없었다면, 조금 잘난 왼손이라는 놈도 제 혼자서 뜨개질을 할 수는 없습니다. 꽃동네에서 살아가는 일도 그런 것 아닌가 생각해요. 지체와 지체들이 모여 하나를 이룰 수 있는 곳, 그 곳이 꽃동네 아닐까요.”

권씨의 뜨개질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권씨에게 뜨개질은 세상과 교호(交互)할 수 있는 통로이자, 저쪽 세상과 친화될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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