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수해 상처 언제나 새살 돋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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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수해 상처 언제나 새살 돋나
  • 오옥균 기자
  • 승인 2005.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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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 서평리 95년 수해 농민들 생계유지 어려워
여성영농후계자 전영순 씨 개인소송도 패소

강외면 서평리 일대의 수해농가들은 1995년 당시 입은 재산피해로 10년이 지난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중에서도 땅을 임대해 농사를 일구던 농민들은 더 큰 시름에 빠졌다.

이 밖에도 농업기반공사와 양지기업을 상대로 22억여원의 피해보상소송을 제기한 85명의 농민들 가운데 이미 고인이 된 7명의 유족들은 선친의 소송비용을 물어내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였다.

농촌인구의 고령화는 강외면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은 땅이 있어도 힘에 부쳐 경작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1995년 수해를 입었던 서평리 일대의 농민 중에는 휴경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던 사람들도 다수였다.

   
▲ 전영순씨는 수해의 아픔을 딛고 지금은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다.
‘희망을 절망으로 바꿔버린’ 수해의 상처

1994년 남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혼자 몸으로 4명의 자식들을 키우던 전영순씨에게 1995년 수해는 남들보다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10년 넘도록 지병을 앓던 남편이 남긴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빚이었다. “나야 어찌되든 아이들만은 제대로 키우고 싶었다. 배운 것이 농사일이라 다른 일은 생각해 본적도 없다”고 말하는 전 씨의 얼굴 곳곳에는 지난 세월 고생의 흔적이 묻어났다.

건강한 남자들에게도 힘에 부치는 농사일을 여자의 몸으로 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90년 고민하던 전 씨는 하우스 재배를 하기로 결심하고 동평리 일대의 땅 4400여평을 임대했다. 그리고 농협에 대출을 받아 하우스를 지었다. 집안일은 어린 딸에게 맡기고 새벽부터 밤늦도록 상추, 오이, 토마토와 씨름을 했다. 하우스 농사를 통해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남편의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었던 전 씨에게 동평리 하우스는 자기 자신보다도 중요했다.

“남편이 세상이 떠나던 해, 상추농사가 잘돼 잠시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고 전 씨는 말했다. 당시 그의 ‘고소득농갗 표창을 받기도 했고, ‘여자영농후계자 원예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그의 성실함은 정평이 나 있었다. 그 해 남편이 남기고 간 빚을 절반이상 갚고 삶이 고달프기만 했던 그에게도 희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절망이 되었다.

“우리 하우스는 배수장과 1km이상 떨어져 있다. 1995년 8월 25일 예정대로라면 하우스에 오이모를 심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하우스에는 어느새 황톳물이 허리까지 차 있었다”고 전 씨는 말했다. 배수장을 통해 역류한 황톳물이 작물의 피해를 더 크게 만들었다. 마을 주민 김홍식 씨는 “지대가 낮은 지역이라 많은 비가 오면 종종 농경지가 침수되곤 한다. 하지만 그 당시는 황톳물이 일대를 모두 덮었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고통 속에 보낸 십년의 세월

공들여 키운 토마토와 오이, 수박, 호박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못쓰게 되자 전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수 천만원의 재산피해를 입은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간신히 갚아나가던 빚은 도로 그만큼 불어나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다 정리하고 농사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할 줄 아는 일이 농사짓는 것 밖에 없어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또다시 빚을 내 하우스를 지었다”고 말하며, “전에도 큰 비를 본적이 있지만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처음이다. 나중에 피해의 원인이 배수장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원망스러웠다”고 북받치는 감정을 토로했다.

전 씨는 바쁜 와중에도 소송 일에 적극적이었다. 어느 정도의 피해보상액이 나와야 농경지 임대료라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003년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농업기반공사의 항소로 고등법원으로 넘어간 재판에서 전 씨는 고소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고소인 명단에는 자신이 아닌 사망한 남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던 것이다. “피해조사는 모두 내 이름으로 이뤄졌지만 어찌된 일인지 고소장에는 남편의 이름으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 일로 전 씨는 마을 사람들과 별개로 소송을 시작해야 했다. 새로 시작한 소송은 더 어려웠다. 당시에 전 씨가 농사를 지었다는 것부터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4명의 자녀를 키우고 농사일을 하면서 소송까지 준비하던 전 씨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자신의 피해사실을 주장했지만 결과는 다른 주민들과 같았다. “이해할 수가 없다. 판결문에는 역류된 사실도 인정되고 ‘청원농지개량조합이나 그 관리직원은 문제점에 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명시하고서도 내가 경작하던 농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지대가 높다는 이유로 피해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분개했다.

전 씨가 개인의 자격으로 소송을 제기한 2005년 1월 20일 1심판결에서 전 씨의 땅은 법원에서 인정하는 인재의 영역인 해발 24.07~24.25m에 포함되지 않고 그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해당사항이 없다고 선고했다. 전 씨는 “그럼 우리 농지에 들어온 황톳물은 어디서 들어왔다는 것이냐. 그 광경이 눈앞에 선한데 판결대로라면 내가 침수도 안된 땅을 침수됐다고 억지라도 부린다는 말이냐”고 억울해 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자포자기

전 씨는 항소할 수도 있지만 같은 내용으로 낸 집단소송이 최종심에서 패소한 상황에서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항소심을 포기한 전 씨는 집단소송을 낸 농민들과는 별개로 상대방 소송비용을 물어내야 한다. “당장 하우스에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더 이상 소송에 쏟아 불 힘이 없다. 너무 억울하지만 농민이 농업기반공사를 상대로 하는 소송이라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을 깨달았다”라며 망연자실했다.

그나마 전 씨의 경우는 성공사례다. 그는 10년간 지독할 정도로 일을 해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빚을 모두 갚고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런가하면 현재 암 말기 판정을 받고 병상에 누워있는 이 모(75)씨는 수해 당시 종중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짓다가 2000여만원의 재산피해를 보았다. 배추농사를 짓던 이 씨는 빚을 갚기 위해 몸이 아픈 줄도 모르고 농사일을 했다. 하지만 이미 노쇠한 이 씨의 몸은 힘든 농사일을 버텨내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빚을 떠넘기고 가야하는 것이 가장 미안하다”며 눈물 흘리는 이 씨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물을 수 없었다.

이 밖에도 더 이상 농사일을 지속할 수 없어 마을을 떠난 사람들과 개인파산신고를 한 농민들도 적지 않다. 수해농민 이모 씨는 “농업기반공사가 뭐하는 곳이냐. 농민들이 좋은 환경에서 농사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기관이 농민들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농민의 편이 돼야 할 농업기반공사가 소송비용을 청구하는 것은 피해 입은 농민의 돈을 뜯어, 먹고 살만한 변호사와 대학교수에게 주는 꼴이다”라며 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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