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판사가 뭐하는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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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판사가 뭐하는 사람이에요?
  • 충북인뉴스
  • 승인 2007.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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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택 수 청주지법 공보관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 아들이 어느 날 저녁 뜬금없이 내게 물은 말이다. “친구들에게 아빠가 판사라고 자랑했더니 진짜냐고 하면서 꼬치꼬치 묻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아빠가 하는 일을 제대로 말해 줄려고요.” 옆에서 듣던 그 애 누나가 한심하다는 듯이 설교한다(그래봐야 딸도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하다).

“야, 넌 그것도 몰라. 아빠는 나쁜 사람을 벌주는 일을 하시는 거야.” 듣고 있자하니 설명이 너무 턱없이 부족하고 자세히 말해 주자니 아이들 표정으로 볼 때 선뜻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 난감했다. “그래, 누나 말이 맞아. 아빠는 누가 나쁜지 판단하는 일을 하고 있어.” 이렇게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혼자 돌아앉아 생각하니 둘째 놈의 물음은 대단히 예리한 부분이 있었다. 몇 년 전인지 기억나질 않지만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 과연 내가 법관이 된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지 상당히 깊게 고민하였던 것 같다.

판사가 되어 일하는 지금은 무슨 각오로 매일 살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민사사건 및 형사사건 배석판사로, 파산사건 배석판사로, 신청사건 단독판사로, 형사사건 단독판사로 이어가며 일해 왔지만 판사로서 진정한 일이 무엇인지 한번쯤은 깊게 고민하였어야 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이는 법원에 오면서부터 듣던 격언이었다. 물론 이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판사는 우선 들어야 한다. 당사자의 말을 신중하게, 책임감 있게, 때로는 참을성 있게 들어야 한다.

양쪽 말을 균형 있게 차근히 중립적으로 듣다보면 사건의 해결방향이 의외로 손쉽게 도출되는 경험을 자주 하였다. 그리고 판사는 판결 전이라도 사건의 진행 방향을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해 줌으로써 당사자들이 자신의 소송행위의 결과가 어떠한 것이 될지 예측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판결에 진정으로 승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듣는 과정과 말하는 과정을 모아 보면, 판사의 일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고, 다만 서로 교환하는 의사가 법률적인 내용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다른 사회 영역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처럼 판사가 하는 재판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재판이 어느 일방의 말만 듣는다거나 판사의 말만 듣게 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서로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난 후 판사가 내린 결론에 모두 승복하는 재판이야 말로 모든 판사들이 꿈꾸는 이상이다.

요즘 우리 법원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이는 밖으로부터의 요구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법원 안에서부터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의식이 점점 켜지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요컨대 사법권한을 부여한 주권자인 국민이 만족할 수 있는 법원으로 거듭나자는 노력이다.

우리 청주지방법원은 올 해 판사들이 직접 초등학교 학생들을 찾아가 같이 수업을 하는 ‘법원-학교 간 멘토링’을 시작할 터인데 이것도 위와 같은 노력의 하나일 것이다. 부디 법원의 작은 노력들이 쌓여서 우리 아들이 장성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 내가 일한 법원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오늘 판사로 일하는 나를 이끄는 힘이 되고 있다. 현명한 질문을 던져준 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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