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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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였다”
  • 박소영 기자
  • 승인 2007.09.19 1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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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국주의가 부른 참혹한 전쟁의 기록
한국군 ‘박정희 군사’로 불리며 가장 늦게 철수

신짜오! 베트남! 
1. 평화 꽃피운 호아빈 학교 준공식 
2. 전쟁의 상흔 호치민 전쟁박물관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시에는 종전 이후 최초로 세워진 건축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박물관이다. 75년 종전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박물관을 세우는 일. 그 해 민간인 최대 학살로 알려진 ‘밀라이 지역 학살 기념관’이 세워졌고, 푸옌성의 한국군 증오비도 역시 같은 해 세워졌다. 하루 동안 피죽을 못 먹던 시절이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쌀을 갹출해 증오비를 세웠다고 한다. 안내를 맡았던 구수정씨는 “베트남이 과거를 대면하는 방식이 미온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1945년 베트남 북부에 호치민 정권이 들어서고, 남부에는 미국이 세운 ‘고딩디엠’정권이 세워진다. 고딩디엠은 결국 암살당한다. 1975년 4월 30일 대통령궁을 소년 병사가 밀고 들어가면서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증방민은 항복문서에 서명하지만, 실제 공식적인 통일을 이룬 것은 76년 7월이다.

   
 
  ▲ 호치민 전쟁박물관에서 안내자 구수정씨의 설명을 듣고 있는 충북민예총 예술가들.  
 
전쟁박물관 ‘역사의 진실관’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총체적인 자료들이 수집돼있다. 100년동안 프랑스 침략기, 이어 30년 동안 펼쳐진 베트남 전쟁사의 참혹한 실상들이 나열돼 있다. 구수정씨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쌍둥이 전쟁으로 불린다.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반발로 미국은 동남아 지역에 대한 안보위협을 느꼈고, 베트남을 마지막 보루로 여기고 전쟁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은 남조선 병사들, 따이한(대한)병사들, 박정희 병사들로 불리며,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 29일까지 주둔한다. 한국군은 미군의 군대 요청에 가장 먼저 대답했으며, 또 가장 늦게 철수했다. 미군 철수를 도와줘야하는 마지막 임무 였고, 또 파병규모도 5만명으로 단연 1등이었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쏟아진 폭탄은 세계 제1,2차 대전에서 사용됐던 양보다 1.5배에 달한다. 베트남 전쟁은 ‘융단폭격’ ‘초토화 작전’등 전쟁사에 없었던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이 쏟아 부은 폭탄 비용보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헐리우드 영화의 수익금이 훨씬 앞선다고 했다. 역사의 진실관은 맥라나마 장군의 회고록으로 끝마친다.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고, 미래 세대에게 잘못을 알릴 의무가 있다.”

전쟁박물관의 두 번째 전시관은 베트남 전쟁범죄전시관이다. 이곳의 첫 전시물은 1776년 발표한 미군독립선언문이다. 구수정 씨는 “베트남 사람들을 두 가지로 정의하자면 ‘위트와 재치’, 그리고 ‘낙관’이다. 결국 자유와 인권 보장을 선언한 독립선언문은 미국의 허상을 꼬집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시관에는 밀라이 지역 학살의 기록들과 고엽제로 인해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들이 포르말린병에 담겨져 있다. 현재 베트남에는 400만명의 고엽제 환자가 있고, 해마다 5만명의 기형아가 태어나고 있다. 그리고 전쟁박물관에는 처형에 쓰였던 단두대, 고문기구, 감옥 모형들이 전시돼 참혹한 상황을 대변했다. 또한 카메라를 무기로 전장을 누볐던 종군기자들의 사진과 작품들이 한 곳에 따로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총탄이 박힌 카메라는 그렇게 전쟁의 참담함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주려고 하지 말고, 배우려고 하라’
30여개 베트남 관련 민간 교류 모임들
민간인 학살 지역 농활부터 의료봉사까지

베트남 중부의 푸옌성, 꽝남성, 꽝하이성, 빈딩성, 카노아성 등 5개성은 민간인 학살의 상흔을 간직한 곳들이다. 충북민예총이 푸옌성과 교류의 물꼬를 튼 이유도 ‘예술로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상생을 노래하자’는 것이었다. 구수정(42)씨는 “베트남과 한국의 교류는 작은 단위에서 출발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모임’이 베트남 작가동맹과 손을 잡은 것이 처음 시작이었다. 현재는 30~40개의 작은 교류모임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구수정씨는 99년 잡지 ‘한겨레 21’을 통해 베트남전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처음으로 보도한 인물이다. 현재는 베트남 대학에서 전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구수정씨는 93년 겨울 베트남으로 유학을 왔으며, 97년 논문을 준비하던 중 베트남 공식문서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남베트남 한국군의 잔학행위가 기록된 문서를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는 것. 그러던 그는 20세기가 지나기 전 세상에 알릴 것을 결심하고, 99년 언론을 통해 공개한다.

한 베트남인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구씨를 위한 연극을 만들 정도로, 베트남 국민들이 그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고 전했다.

베트남 교류는 방향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나와 우리’는 한-베트남 대학생들이 함께 민간인 학살 지역을 답사하고, 직접 교실 및 병실 짓기에 나선다. 일종의 농활프로그램이다. 이들은 주민들과 함께 숙식 하면서 전쟁의 고통을 가까이서 나눈다. 또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국제민주연대, 평화를 심는 사람들 등이 활동 중이다.

구수정 씨는 “베트남 교류가 잘사는 국가에서 일종의 ‘수혜’한다는 태도를 갖고 이뤄진다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러한 교류는 결국 지속성도 갖지 못한다. 현재의 교류는 베트남과 함께 상생하기 보다는 아픔을 이해하는데 힘써야 한다. 교류를 통해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충북민예총 교류에 대해 “베트남 교류의 모범사례가 될 만하다. 민간 차원의 문화예술교류가 경제교류를 이끌어냈고, 관 차원에서도 지원의 물꼬를 텄다”고 덧붙였다.

민간인 학살은 우리나라도 안고 있는 문제다. 제주에 4.3항쟁이 있고, 충북에는 노근리 문제가 있다. 그는 “민간인 학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만큼 관심을 갖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 푸옌성의 벼와 사탕수수가 유명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지만,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주둔지로 학살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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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류에서 충북도 대표단을 이끌었던 노화욱 정무부지사가 본사로 시와 짧은 글을 보내왔다.

그대 베트남에게 부치는 시
ㅡ어제에 잠들지 않고
내일을 사는 그대에게ㅡ

노화욱

사무치는 분노를
극복한 가슴
그대 강인하여라

잔인한 적을
용서한 영혼
그대 위대하여라

고단한 역사의 새벽을
헤쳐나가는 열정
그대 참 아름다워라

동녁의 태양은 서쪽으로 향하는 법
오늘 비록 저 태양
아메리카에 잠시 머물지라도
내일이면
베트남 그대
가녀린 어깨와 웅혼한 기상을
길이 비추이리니
찬란하게 비출지니
(2007. 9.4 호치민 전쟁 기념관에서 느낀 단상을 투이호아 向 기내에서 옮겨 그리다.)

해방 65년 우리는 아직까지도 일본을 용서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과거는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에게 오직 미래만 있을 뿐…” 나는 내게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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