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청주의 지리를 공부할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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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청주의 지리를 공부할 수 있는 곳
  • 충청리뷰
  • 승인 200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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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성을 쌓았을까 아이들과 대화, 상당산성 복원도도 그려보자

삼국시대 때부터, 충북은 나라의 중간에 있어 이 곳을 차지하려고 다투다보니 청주주변에는 산성이 많았다. 오늘은 그 중에 역사와 들꽃의 보물창고인 상당산성에 아이들 손잡고 성돌이를 해보자. 상당산성에 숨어있는 이 곳 저 곳의 보물을 찾으며 한 바퀴 걷다보면 지루하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알찬 체험학습의 기회가 될 것이다.

상당산성은 과연 누가 쌓았을까. 김유신장군의 아들 원정공이 쌓았다고도하고, 김유신장군의 아버지 김서현장군이 쌓았다고 하는 말도 있다. ‘상당산성 고금사적기’에 의하면 궁예가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상당산성은 오목한 분지와 산등성이를 둘러쌓은 포곡식에 내탁공법으로 쌓았다. 옛날에 쌓은 성은 지금의 상당산성이 아니라 현재의 산성 밖으로 쌓은 토성이다. 토성의 흔적을 서문쪽에 가면 확인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병마우후(첫째로 높은 병마절도사는 청주읍성)가 주둔하고 있었고, 청주를 한 눈에 내려다보는 곳에 있어 군사적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관리와 군사들이 주둔을 했고 성을 지키려면 많은 군량미가 필요해서 이 곳에 절을 지어 승병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했다.

그렇다면 상당산성은 왜 쌓았을까. 그것은 평지의 청주읍성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산성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싸움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당산성에는 3개의 문과 암문이 두 개 있다. 성안에는 동헌과 군관청, 군창고, 화약고 ,운수헌 따위의 많은 건물이 있었고, 절, 암자, 연못,우물이 있었다.

먼저 상당산성의 정문인 공남문부터 걸으며 살펴보자. 남문앞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문옆 벽을 자세히 보면 19c초까지 누가, 언제 이 성을 개,보수했는지 기록이 남아있다. 일종의 공사실명제라 할 수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항아리의 안쪽 벽같은 옹벽이 있다. 그것은 상당산성이 보이는 특이한 구조로 적을 가둬서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지형적으로 옹성을 쌓을 수 없어 옹벽을 만들었고 성밖으로 돌출된 치성을 3개나 만들어 적이 성벽을 타고 오르는 것을 막기위해 일자형의 성쪽에 설치했다.

공남문을 통해 위로 올라가면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이 있다. 이것이 ‘여장’(女墻)인데 남문 주위에만 복원을 해서 성의 정취를 더해준다. 이 곳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있어 아이들에게 무엇에 쓰였는지 알아맞히게 해보자. 아이들은 호기심에 성밖을 보면서 “멀리보여요” “가까운것만 보여요”하며 재잘댄다. 구멍 바닥이 수평인 것과 비스듬한 것이 있어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다.

총과 화살을 쏘기 위한 이 총안과 타구는 병력을 배치하는 기준이 되기도해서 성을 지킨 군사가 얼마인지 추측할 수 있다.
이 여장을 지나 서쪽으로 성길을 따라 올라가면 청주 시내를 내려다보이는  지점이 있다. 옛날 청주 사람들이 왜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짐작을 하며 옛 청주의 지리 공부를 할 수 있는 현장이다. 남쪽으로 봉수터가 있던 것대산도 보인다. 옛날에는 것대산의 상봉재와 상당산성을 거쳐 진천, 안성 ,서울로 가는 큰 길이 있었다. 1번 국도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다. 공남문과 미호문 사이에 비밀통로인 암문이 있는데 이 길이 것대산과 통한다.
여기서 발걸음을 옮겨 서문 쪽으로 계속 가다보면(성곽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야가 달라진다) 밑으로는 율량동 시가지와 무심천이, 멀리는 미호천과 증평평야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이것을 보면 동쪽보다는 서쪽을 방어하기 위한 성임을 알 수 있다. 이 곳에서 아이들에게 옛날 길을 상상해보게 하거나 우리동네 찾아보기를 하면 방향감각도 익힐 수 있어 좋을 듯 싶다. 아울러 서쪽의 부모산성과 정북동 토성도 찾아보면 좋겠다.

서문(미호문)쯤 오면 아이들이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그러면 성곽길 바닥과 성곽 벽에 있는 수구 찾기를 해보자. 성곽 길바닥에는 멧돌 모양의 수구 입구가 있고, 성곽 벽 사이에는수구 출구가 있다. 수구는 성안의 빗물을 빼내기 위한 것으로 상당산성에 3개가 있다. 이 곳에서 빠져나간 빗물은 한강 남쪽과 금강 북쪽으로 흐른다고 해서 ‘한남금북정맥’의 줄기가 된다.  

 지금 상당산성은 서문(미호문)부터 동문(진동문)까지 구간을 성벽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공사중이라 성곽을 밟으며 돌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숲길을 걷다보면 고마리, 며느리 밥풀꽃, 물봉선, 미역취등의 가을 꽃을 볼 수 있어 또 좋다. 들꽃을 관찰하면서 상당산성에서 가장 가파른 지형에 기우제를 지낸 큰 바위인 기우단을 찾아보자. 기우단을 내려오다 보면 동암문이 있고 급경사길 바로 아래에 진동문이 있다. 한옥마을 바로 뒤편이다. 이 곳에는 전시 때 장군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던 동장대(보화정)가 있다. 피곤한 다리를 쉴겸 동장대에 올라보면 상당산성의 동서남북 진영이 한 눈으로 보이기 때문에 옛사람의 역할극을 하기 좋을 만한 장소다.

또한 성 답사의 마무리로 ‘우리가 복원하는 상당산성의 복원도’를 그리기에도 좋은 곳이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이 곳을 찾아가면 꼭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화투를 치는 어른들이다.
 
 

용어풀이
포곡식:계곡을 포함한 두 개이상의 산꼭대기를 두른 산성으로 성안쪽에 시내나 개울이 있다.
내탁공법:성 바깥쪽은 적을 방어하기위해 수직으로 쌓고 내부는 흙과 자갈 등을 채우고 성위로 길을 내어 무기와 군대의 이동을 쉽게 한 방식
치성:성벽에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발견하고 그 적을 일찍 물리칠 수 있도록 성 바깥쪽으로  성을 내서 쌓은 것
옹성:적이 성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이중 성벽
암문:구석진 곳에 작게 만든 비밀 통로
상당산성 ‘남문’모습청주건설박물관 손광섭 관장의
탐사연재 ‘세상의 통로 ‘橋梁’을 찾아서’ ? 강화 석수문

강화도 조약 체결 현장, 역사적 아픔의 터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 1977년 현재 위치에 복원
강화내성은 관청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내성은 현재 강화군청을 비롯하여 강화경찰서.강화우체국.고려궁지.강화향교 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말하는데, ‘강화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의 강화내성은 동서남북문과 4개의 암문, 2개의 수문.남장대.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서문(瞻華樓).남문(晏波樓).북문(鎭松樓)은 복원되어 있고, 동문(望漢樓)은 강화군청에서 부지를 구입하여 복원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4개의 암문 중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소남문뿐이다. 수문은 상수문만이 복원되어 강화석 수문으로 불리고 있다. 유적으로는 연무당.고려궁지.행궁.강화유수부 동헌.이방청.용흥궁 등이 있으며, 남장대.북장대는 터만 확인되고 있다.
내성의 둘레는 7122m, 높이는 3m내외이고 너비는 4m내외이며, 성가퀴의 높이는 1m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東洛川)을 가로지르는 수문은 세 개의 무지개 모양의 한 홍예문으로 수문역할을 하면서 사람이 통행할수 있도록 다리를 놓은 것이다.
이 수문은 1711년(숙종37년)에 축조되었으며, 길이 18.2m, 높이 2.7m, 폭 4.7m이고, 홍예의 높이는 1.7m, 폭은 3m이다. 3개의 월단(月團)수문으로 되어 있는데, 각 수문은 화강암을 다듬은 선단석(扇單石)을 4~5단으로 쌓아 이를 교각으로 삼고, 그 위에 매끄럽게 다듬은 월단석을 반원형으로 잇대어 아치를 이루도록 하였다. 아치와 아치 사이에도 다듬은 무사석으로 메워 올려서 아치석 윗돌과 평평하게 한 다음 그 위에 흙을 깔았다.
1910년 갑곶리(甲串里)선착장을 신설하고 그옆 동락천 하구(河口)의 교량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옮겨 시설하였다가 1977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에 옮겨 복원하였다.
강화에는 또 1676년(숙종2년)에 축조한 갑곶리 석수문도 있는데, 역시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4단의 기단 위에 11개의 각석으로 홍예(虹霓)를 틀고, 홍예사이에는 직사각형 대석으로 8층을 쌓아 단단히 축조한 것으로 갑곶진(甲串鎭)의 통로였다.
또한 석수문옆에는 연무당의 옛터가 자리잡고 있다. 연무당은 강화부의 군사를 훈련하던 곳으로,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한 곳이다. 이 조약으로 인천. 부산. 원산의 항구가 개항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으나 치외법권 등을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민족의 시련이 시작된 현장이며 뼈아픈 역사적 반성의 터라 할수 있다.

 

  “세상의 통로, 교량을 찾아서” 연제를 마치며...

  우리의 옛 다리들은 그 자체로서 역사였다. 그 역사의 향기는 그대로 묻어 오늘에 있었고, 그 천년 역사의 다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내게 기쁨이고 축복이었다. 또한 그것은 내게 또 다른 인생의 발견만큼이나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다. 감히 그 천년전의 멋과 여유를 어찌 내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겠는가.
다리가 그냥 다리가 아니었다. 다리의 돌 하나 하나에 예술이 있고 해학이 있고 그리고 늘 함께하는 사람의 냄새가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다리에 넋을 잃어 정작 독자들께는 하고 싶은 얘기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다리에 집착하다 보니 ‘이야기’를 놓치지 않았나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리가 사람을 위한 구조물이었고, 그래서 사람과 함께 하는 많은 여유를 천년 전 그들은 담아왔다는 것을 좀더 정감있게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그 잘 생긴 다리들을 만나는 동안 나는 많이 행복했다. 수십번을 찾아가도 늘 그 자리에 있는 그들 다리가 나를 참 행복하게 하였고, 천년전의 그들과 얘기 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을 느낄수 있게 해줬다.
  이제 아쉬움으로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사랑해준 분들, 그리고 이글을 위해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천년후,다시 다리를 만나다”단행본으로 출간

★ 그동안 연재했던 ‘다리이야기’를 제 회갑 기념으로 단행본으로 출간하려 합니다. 더많은 곳을 담고, 다시 찾아다니면서 원고의 부족한 점을 더 보완하여 10월 “천년 후, 다시 다리를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여러분의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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