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불귀의 객 ‘두 영웅’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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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불귀의 객 ‘두 영웅’ 잠들다
  • 이승동 기자
  • 승인 2009.10.14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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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원정대 사선의 선봉대였던 민준영·박종성 대원
직지루트 개척위해 용감하게 탐험나선 山사나이들

지난 11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히운출리 북벽 직지봉 신루트 개척에 나섰다 실종된 직지원정대 민준영 대원(36·등반대장)과 박종성 대원(41·수송)의 영결식이 가족들의 오열 속에 치러졌다.

지난해 직지봉 등정 성공에 이어 올해 북벽 신루트 개척에 나섰던 두 산 사나이는 지난달 25일 오전 8시15분쯤(한국시간 11시30분) 교신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 됐다. 그들은 유해대신 히말라야의 흙과 소지품을 담은 유골함의 영혼으로 돌아왔다.

히운출리 북벽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곳으로 악명이 높다. 며칠을 올라가야 끝이 보이는 이 거벽을 그들은 어떠한 사전정보 없이 알파인 스타일로 직지봉의 신루트 개척의 선봉에 섰다.

‘직지루트’이라는 이름을 새기려 아무도 개척하지 않았던 길에 그들은 목숨을 맡긴 것이다. 이 두 영웅을 재조명 해본다.  

“남들이 개척한 곳은 의미가 없었다”
민준영 직지원정대 등반대장

대기업 핸드폰 연구원으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며 미래를 보장 받았던 민준영 대원. 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을 산에 묻고 산 사나이로 돌변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작정 산이 좋아 조그마한 산을 오르내리며 산과 친해졌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파키스탄 ‘골든필라’ 기둥바위를 직접 본 것을 계기로 보장 없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 순간 오로지 저 암벽을 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산에 미쳐 가기 시작했다. 오로지 클라이머가 되겠다는 목표로 친분도 없는 산악인 선배를 찾아가 기술을 익히고 5년 동안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전문산악인으로 발돋움 하게 된다.

민 대원은 자신이 터득한 기술만을 밑천삼아 점조직으로 퍼져 있는 산사람들을 모아 ‘솔봉’이라는 동호회를 조직해 조그마한 암장을 만들었다. 충북 최초로 클아이밍 보급에 앞장선 것이다.

이후 미국의 거대암벽 ‘요세미티’, 파키스탄‘드랑고타워’등의 단독등반, 지난 5월에는 히말라야 거벽인 스팬틱 골드피트(7027m)를 셀파와 고정로프 없이 순수 알파인등반으로 올라 ‘코리안신루트’를 개척했다.

그는 항상 기존루트가 아닌 새로운 루트 개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처음에는 그냥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좋았는데 점점 시야와 생각이 넓어지면서 더 높고 험난한 산을 도전 개척 해보고 싶어지더군요” 살아 생전 그의 말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과 고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순간에도 산을 끌어안으며 정복이 아닌 ‘산에 잠시 쉬어 간다’는 마음으로 정상을 밟아왔다.

동생 규형씨는 “정상에만 오르면 된다는 생각으로 남이 개척해 놓은 쉬운 길을 택하는 일부 산악인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자신의 극단적 한계를 경험해야 진정한 산악인 이라는 의지가 강했다. 형은 8000m급 산을 수많이 오른 어떤 산악인보다 정직하고 위대한 산악인이다”라고 형에 대해 회상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만을 고집한 산악인 민준영 대원은 모든 산악인들에게 히말라야의 신으로 남을 것이다.  
 

“나에게 두 아들은 곧 삶이였다”
박종성 직지원정대 대원

혹독한 시간을 견뎌 강인함의 흔적을 직지 원정대로 하여금 보여준 산악인 박종성(42)대원. 이제 그의 등산

   
화가 더 이상 닳지 않고 빛이 바래져 간다는 것에 사람들은 비통해 하고 있다.

161cm, 60kg의 왜소한 체구지만 산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큰 사람으로 느껴졌던 박대원이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청원군 문의면 수몰민인 그는 어릴 적부터 수몰된 자신의 고향을 보기위해 동네 뒷산에 오르면서 산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산은 그에게 있어 최고의 놀이터이자 학교이자 삶이었던 셈이다. 자연스레 산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0여년전 본격적으로 산악인으로서 열정을 태우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클아이밍 학교를 다니며 암벽등반 2급, 국제심판 자격증까지 취득 전문 산악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산을 타기 시작한지 2년만에 히말라야 칸첸중가 등반을 출발로 유럽 알프스 등반, 2003년 미국 요세미티 러킹피어 등을 등반 지난해에는 파키스탄 히말라야 카라코람 산맥의 무명봉(6235m)을 올라 ‘직지봉’으로 명명하며 베테랑 산악인으로 이름을 알려 왔다.

하지만 박대원은 진정한 산악인으로서 인정보다 자신의 두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 산에 올랐다. 박대원의 형 종형(45)씨는 “동생은 집안에 위급한 일이 생겨도 다음날 산에 오르기 위해 배낭을 꾸렸다. 산에 미친 동생을 나중에는 어머님도 이해해 주셨다. 하지만 동생은 언제나 자신의 성취감, 만족보다는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의 강인함을 보여주기 위해 산에 올랐다”고 전했다.

그는 여러 번의 사업실패에도 산은 절대 포기 하지 않았다. 화장품영업일을 하며 조금씩 마련한 돈으로 다시 산을 등반을 시작 했다.

또 자신의 등반기술이나 산에서 맛보는 성취감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자비로 미국 요세미티 공원의 암벽산을 대학생들과 함께 등반하는 등 산에 관련한 교육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 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대자연을 통해 경험한 것을 혼자만 간직하기보다 나누어야겠다는 것이 박대원의 철학이었다. 가족들은 유해조차 보지 못했지만 이미 박대원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가슴에 묻었다.

형인 종형씨는 “의미 있는 죽음으로 가족들은 동생의 죽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많은 시간을 보내주지 않아 아버지를 원망해 왔다던 두아들은 아버지를 향한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의 죽음을 여전히 믿지 않고 있다고 종형씨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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