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의 전당에서 할머니들, 한글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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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의 전당에서 할머니들, 한글을 외치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12.10.1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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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에 한글 쓰러 가신 시골 할머니들

옥천 보따리장수 권단의 풀뿌리 이야기

푸르른 잔디밭에서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나이테가 많아 두께는 굵었지만 고향을 지키느라 등걸이 휘고 또 휘었습니다. 그렇게 더불어 숲이 되었습니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그런 세상에서 참 한많고 서럽게 살았더랬습니다. 약자 중의 약자로 말이지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지 566년이 지났지만 할머니들에게는 여전히 두렵고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한글이었지요. 시월구일 한글날 전국에 할머니들이 민의를 상징하는 국회의사당에 모였습니다. 일년에 하루 이렇게 모인 것이지요. 그 목소리를 틔우기 까지 그 글을 틔우기 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었는지요. 깜깜한 밤 헤메고 한과 설움을 간직한 채 살았었지요.

▲ 전국문해 한마당 잔치가 끝나고 다 같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전국문해한마당 잔치는 지역 곳곳 풀뿌리 어머니 학교의 목소리가 모아졌습니다. 이 날 따라 국회의사당이 기분좋아진 듯 슬며시 웃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들의 한글 쓰는 모습이 한글 읽는 모습이 가을 하늘만큼이나 청명했습니다. 우리네 할머니들의 한글날 이야기입니다.

교육평등 행복나눔 이라 굳이 외치지 않아도 할머니들의 마음은 벌써 흐르고 있었습니다. 누가 삐뚤빼뚤 하다고 했나요? 바른 글씨는 어떤 건가요. 틀린게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인데. 각자의 무늬대로 글을 쓰는 것일 뿐인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글자로 박혔습니다. 박힌 글은 마음에서 울렸습니다. 울린 마음들은 하나로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모아진 마음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위대한 발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글날은 할무이들 마음 설레는 날

해마다 시월 구일은 한글을 새롭게 배우는 할머니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날입니다. 어렵게 어렵게 배우고 익힌 글 같이 나누러 한양으로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과거 시험 보듯이 말이지요. 어젯밤 그리하여 잠도 뒤척였습니다. 혹시 차 놓칠까봐 새벽 일찍 길을 나섰더랬지요.

안남어머니학교 명월 어머님은 머리도 하고 곱게 화장을 하고 오셨습니다. 화장하셨네요 했더니 그럼 한양 가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하십니다. 언년 어머님은 옥수수 수염차 연잎차를 해 오셔서 따라 주시고 영금 학생회장 어머님은 삶은 계란을 싸 오셨습니다. 한상옥 선생님은 우리 밀로 직접 만든 머핀을 선물로 주셨습다.

▲ 충북에서는 괴산 두레학교, 옥천 안남 어머니학교, 안내 행복한 학교, 보은 흙사랑학교 등이 참석했다.

배울 길 없었던 우리 어머니네 삶

이제는 여든 두살이 훌쩍 넘은 김명월 어머니는 학교 문집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살아온 길 왜정시대 열 네살에 큰 애기 모집에 뽑혀 부산 방직회사 베짜는 공장에 갔다. 일 년 후에 해방이 되어 집으로 와서 부모님 곁에 한 달 있었다. 그 순간에 친구 소개로 또 다시 대전 홍아직표 공장 비단 짜는 데를 다시 갔다.

일년도 안 되어 집에서 오라고 연락이 와서 집에 와보니 시집가라고 사주를 해놓고 시집을 가라고 하니 부모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열 여섯에 결혼을 하고 열 여덟에 임신을 하여 아들 넷을 끝으로 딸 하나 오남매 교육시켜 각자 성실하게 가정을 지키고 살으니 그만하면 됐다.

엄마는 마음이 흐뭇하고 마음이 행복하다. 이천삼년도에 갑자기 큰 아들은 처 아들 딸 남매에게 집 가사를 다 맡기고 사고로 생명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떴으니 아무리 애타도 애탄 무덤 없다. 너 동생들 사남매가 잘 챙겨줘서 많이 사니까 어머니 학교가 생기고 그리고 마을 뻐스도 생겨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면 여러 선생님들께서 챙겨주시고 베풀어주시는 큰 은덕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러 친구들을 만나면 재미있게 서로서로 손을 잡고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지키며 사는 세상이 왔다. 나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 할머니들이 전국문해한마당에서 직접 쓴 시화전을 보고 있다.

한글도 못 배운 사람에겐 문턱

여든살 역시 넘은 같은 어머니 학교에 사는 박복임 어머님은 이렇게 씁니다.
“아버지 아홉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가 청성면 구음리에서 컸습니다. 나이 십칠세에 결혼하고 18세에 애기 났습니다. 그리고 5남매에 자식을 얻었습니다. 산꼴에서 사느라고 고생도 하고 늦게는 걱정없이 살마고 하니 몸에서 병드러서 가진 고생 다 합니다. 나이가 먹고 기운도 없어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찌할까요? 한글날입니다. 한문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라고? 설마 이러시진 않겠지요. 한글도 또 하나의 문턱이고 계급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겪지 못하는 사람은 잘 모를 것입니다.

말은 태어나서 절로 트이게 되었으나 글은 배우지 못하면 까막눈이 되지요. 격동의 현대사를 힘겹게 고스란히 살아낸 우리 어머니들은 글에서도 보았듯 세월의 격랑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며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배울 시간도 공간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고 한 세월이 지났고 많은 것이 바뀌고 변했지만 그네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더랬습니다.
설마 한글을 모르겠어? 아이구 어쩐댜. 그러고 말았던게 대부분이었지요.

한글 그리고 가슴 아픈 사연들

▲ 버금상과 마중물상을 받은 보은 흙사랑학교 박옥길 교사와 강복남 할머니.
참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2003년 안남어머니학교가 처음 열리던 날은 바로 그 쌓이고 싸여 가슴팍에 암덩어리같이 생긴 응어리가 풀리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면사무소, 학교 등 관공서에는 아예 쳐다볼 생각도 가볼 엄두도 나지 않았지요. 농협에도 자기 이름으로 만들어진 통장 하나 없었지요.

어디 가면 문서 들이대며 작성하라는 것도 곤욕이었고 까막눈인 것 들킬까봐 그래서 챙피할까봐 피했던 것입니다.

청정리 송정에 사는 미선이 미혜 할머니는 애들 아빠 사고로 잃고 두 손녀 키우면서 아이들 학교 갈 때 쯤 되니 어머니 학교에 나섰습니다. 손녀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한글 물어보면 가르쳐 줘야 한다고 바쁜 농사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나서서 이른 아침부터 나와 공부를 하곤 했지요.

한글을 배우고 시인이 되다

땅만 파고 흙과 같이 살았던 긴 세월, 흙속에 묻혀 있던 가슴팍 깊숙이 숨겨져 있던 구슬같은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거칠게 물밀듯 밀려나왔습니다.

다리미란 시를 볼까요? “꼬긱꼬긱 옷의 주름 다리미 지나가니 밧밧이 꽉 펴지네” 홍귀녀 어머님이 쓰신 글입니다. “우리 손녀는 이 할미가 불러도 모른척하고 돌아섰네. 이 할미는 얄밉게 쳐다 보았네. 어찌 저리 이마는 툭. 튀어나와 가지고 어쩌면 이리 얄밉게도 귀여울까” 윤정단 어머님이 쓰신 글입니다. 흙을 파면서도 시가 나옵니다. 고마운 감자를 볼까요.

“감자 반쪽을 심었다. 반쪽 감자는 싹이 났다. 싹이 나는 감자는 건강하게 자랐다. 몇개월이 지났다. 감자를 캐보면서 깜짝 놀랐다. 어두운 땅속에서 그만큼 새끼를 친 것이다. 어둠속에서 새끼를 많이 친 감자 배울게 있네. 고마운 감자다” 천연덕 스럽게 김양단 할머니는 흙에서 캔 감자를 갖고 이리 시를 쓰십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2003년 지역의 주민들이 할머니들의 이런 맘을 알아주어 학교를 만들었더랬습니다. 토마토 농부, 구멍가게 아줌마, 목사님, 보험회사 아지매, 면 직원, 밀 농부, 된장 만드는 일꾼 등이 모여서 지금도 할머니들과 같이 배우고 느끼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에게는 종합 선물 보따리 같은 것이었지요.

결코 이 모든 것을 나라가 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웃들의 마음이 모아져서 스스로 해낸 것이지요. 나라는 지금까지 전쟁에 동원하고 이리저리 불러 고생만 찍사리 시켰습니다. 우리네 마을에서 같이 보듬어낸 것이지요. 할머니들은 시방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할머니는 당당한 마을의 주인입니다.

면사무소를 내집 드나들 듯 하고, 농협에 가서 당당히 본인 이름의 통장도 만들었습니다. 읍내 나들이도 병원가는 일도 이젠 두렵지 않습니다. 마을 축제의 무대에도 언제나 주인공입니다. 어머니 학교라는 이름으로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동안 뭉치고 뭉쳤던 말들이 글로 토해져 나오니 단박에 시가 되었습니다. 잔잔히 읽어보면 그냥 눈물이 맺히고 울컥합니다.

이제 어머니학교를 만나러 벌써 곳곳에서 찾아 옵니다. 폴란드 국립영화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어머니학교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다며 엊그제까지 찍어갔고, 공주대학원에서 평생교육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은 어머니학교로 논문을 쓰고 싶다며 찾아들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조금씩 자양분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한껏 힘들게 어렵게 살아온 삶을 온 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글날, 우리의 어머님들이 까막눈을 벗고 드디어 한글을 배운 날, 그 한글이 이제서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쓸모가 있다 생각합니다. 한글날은 그런 의미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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