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으로 떠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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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으로 떠난 여인
  • 충북인뉴스
  • 승인 2013.05.2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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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욱 청주청남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
벌써 16년이 지난 일이다. 1996년 겨울 아침, 상당경찰서(구 동부경찰서)에서 강력계 형사로 근무할 때였다. 신고전화를 받고 출동해보니 청원군의 산속 외딴집에 언뜻 보아도 어린 나이의 한 여자가 이불로 온몸을 감은 채 떨고 있었다.

신고 내용인즉, 새벽 출근길에 한 남자가 흉기로 위협한 채 산속으로 끌고가 성폭행하고 운동화 끈을 이용해 손목과 발목을 뒤로 결박한 후 깊이 약 1.5m 가량의 방공호에 버려둔 채 카드를 빼앗아 도주한 것이었다. 피해자는 몇 십분 동안 끈을 풀어 탈출에 성공, 알몸인 상태에서 맨발로 눈 덮인 산속을 헤매다 외딴집을 발견하여 들어가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인접서에 동일범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확인해보니 범인은 또 다른 피해자를 소나무에 큰대(大)자로 묶어 성폭행하는 등 그 수법이 잔인하기 그지없는 흉악범이었다.

그날 사건을 시작으로 동일수법의 강도강간 사건이 단기간 연이어 발생했지만 치밀하고 신출귀몰한 범인은 현장에서 단서 하나 남기지 않았다. 필자는 궁리 끝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여자로 변장하여 잠복에 돌입했다. 약 보름간 범인의 출현 용의지역에서 잠복한 끝에 필자를 여인으로 오인하여 납치하려는 범인을 격투 끝에 검거할 수 있었다.

범인의 차량 안에서 발견된 칼집에는 장도와 단도 20여 자루가 들어 있었다. 납치당했던 피해자들이 그 흉기들을 보고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범인은 당시 청주·청원지역 인근에서 저지른 강도·강간·절도 행위만 43건, 수원·시흥 등 경기도 일대에서도 수십 건의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져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재판결과를 피해자에게 알려주고자 전화했을 때 그녀는 이미 대한민국을 떠나버린 상태였다. 어느 곳에서 정착했는지는 모르지만, 피해 당시의 공포를 잊기 어렵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떠났다는 말을 듣고 사건을 담당한 형사들 모두 안타까워했다. 왜 가해자도 아닌 피해자가 부모형제가 사는 고국 땅을 떠나야 했는지, 수십 건의 유사한 사건을 경험하며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성폭력을 막을 수 있는 해법이 없을까? 경험상 오로지 중한 처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각종 언론과 포털에 이슈가 되면서 온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고 사법기관은 물론, 정치권, 교육기관, 각종 단체들까지 발빠르게 움직이며 대책을 내놓아 다행히 피해자 보호 및 2차 피해를 방지하고 예방효과를 거두고는 있으나, 사건은 여전히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만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성폭력범에 대하여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진을 동반한 신상공개와 물리적 거세, 그 이상의 형벌을 요구하며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성범죄자도 사람이라면, 인권을 보호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내 가족이 피해를 당한 비통한 심정으로 철저히 반성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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