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광에서는 공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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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에서는 공해가 나온다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6.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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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광해관리 광산 284곳, 전국 14%
파먹는 사람 따로 복구하는 사람 따로
2006년 6월 산업자원부 산하 비영리법인으로 ‘광해방지사업단’이 출범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의 이 조직은 현재 채굴 중인 광산을 비롯해 휴광, 폐광 등 광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피해를 복구하기 탄생했다. 폐수정화, 산림복구, 지반침하 방지, 폐시설물 철거 등이 주업무다.

   
▲ 충남 청양에 있는 금광인 삼광광산은 청주시의 3분의 1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다. 이곳은 2001년 폐광 이후 산더미처럼 쌓인 광미가 그대로 방치돼 바람만 불면 희뿌연 먼지가 흩날린다.
사진은 폐허가 된 제련시설 사이로 보이는 광미 더미.
폐광지역을 진흥하기 위해 정선 강원랜드, 문경 레저타운, 삼척 블랙밸리 컨트리클럽, 영월 동강리조트 등 출자법인도 운영하고 있다.

대전에 사무실을 둔 광해방지사업단 충청지역본부(본부장 유행렬)는 충북과 대전·충남지역의 592개 광해 광산을 관리하고 있다. 이는 전국적인 관리대상 2006개의 29.5%에 이르는 것으로 강원지역 415군데, 경상남·북도 569군데 보다도 많다. 충북만하더라도 284개의 광산이 관리대상으로 분류돼 전국 관리대상의 14.2%에 이른다. 충남 청양의 금광인 삼광광산이나 보령탄좌 등은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규모.

개방형 본부장 공모를 통해 충청본부장을 맡게 된 유행렬(43) 본부장은 충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운동권 출신으로, 광해 문제를 쉬쉬하기보다는 드러내놓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랏돈을 들여 복구에 나서야하는 이유와 명분을 찾기 위해서는 국민들도 속사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광해방지사업단 충청본부는 11월11일 충북지역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과 함께 충북지역의 우일광산과 월유광산, 충남지역의 삼광광산, 보령 냉풍욕장 등을 둘러보는 ‘가을로 떠나는 폐광산 여행’을 실시했다. 폐광답사의 전 과정을 동행 취재했다.


백두산 천지인가, 우일광산

   
▲ ‘아시아 구석기 문화의 빛’으로까지 평가됐던 두루봉 동굴은 석회석 광산 채굴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광업주 사망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는 빗물이 고여 거대한 물웅덩이가 형성됐다.

2만4000㎡ 호수 생성
메우는 흙값만 50억원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우일광산은 1984년에 채광을 시작해 2002년 11월에 폐광된 석회암 광산이다. 흔히 광산하면 갱도를 떠올리게 되지만 석회석 광산은 노천광산이 대부분이다. 우일광산은 한때 유명세를 치렀는데, 1983년 이 일대에서 4만년 전 후기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두루봉 동굴에서는 어린아이의 유골(흥수아이로 명명)과 동굴곰의 뼈, 각종 구석기 등 구석기인들의 생활흔적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하지만 이같은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1년 뒤 석회석 채광허가가 났으며, 지금은 광산개발로 인해 동굴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002년 광업소유권자의 사망으로 폐광이 된 우일광산에는 현재 빗물이 고여서 거대한 물웅덩이가 형성됐다. 넓은 쪽의 직경이 100m에 이르고, 면적은 2만4000㎡에 이른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높이는 50m나 되고 물깊이도 20m에 달해 백두산 천지를 연상케하는 보기에도 아찔한 풍광을 이루고 있다.

자칫 안전사고가 우려되는 까닭에 철조망을 쳐놓았지만 누군가 양어장으로 이용할 셈으로 붕어를 기른 적이 있는 까닭에 간혹 낚시꾼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11일 답사 과정에서도 낚시꾼들이 이용하는 속칭 ‘개구멍’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거대한 폐광의 흔적을 지울 현명한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는데 있다. 되메우자니 흙값만 50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되고, 양어장, 암벽등반장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논의됐으나 사업성을 검토한 끝에 보류됐다.

빗물이 고인 담수호라는 점에서 강수량에 따라 희석을 통해 정수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어 수질관리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광자원화를 고민하기 이전에 침출수에 따른 주변 오염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가 막힌 것은 복구든 관광자원화든 이에 따른 예산을 대부분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광산의 경우 복구에 따른 예치금이 전혀 적립되지 않았고, 1970~80년대에 개발된 광산들도 산업화에 기준을 둔 자원중심의 정책에 따라 예치금제도를 제대로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폐광답사에서 현장 안내를 맡았던 광해방지사업단 권혁주(39) 대리는 “공무원들이 관리감독만 제대로 했더라도 이처럼 무분별한 광산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심지어는 광산을 폐업할 무렵 재산을 다른 사람 앞으로 돌려놓고 나몰라라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노다지? 지금은 노터치!

   
▲ 영동군 황간의 금광인 월유광산은 그래도 복구가 잘 된 편에 속한다. 예로부터 한천8경으로 일컬어져온 수려한 경치가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일제강점기 영동군에만 금광 10여개
폐광오염 심각, 월유광산 등 복구 중



세계제패를 꿈꿨던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땅에 묻힌 황금에 집착했다. 적은 양으로 단숨에 군비를 확보할 수 있고 비상 시 외화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0년대에만 한 해 10조원 어치의 금을 캐내며 세계 5위의 금 생산국으로 올라섰다. 연간 12톤에 달하는 금을 소비하지만 금이 한 덩어리도 나지 않는 현실과 비교할 때 기가 막힌 일이다.

1933년 한 해에 조선땅에서 개발된 금광은 약 3200여군데. 이후 1943년 조선의 황금광시대가 막을 내리기까지 한해 생산량은 10여톤에서부터 30여톤까지 늘어났으며 금값도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이 광산을 뚫는 곡괭이질 소리로 시끄러웠던 시절이다.

일제는 집요하고도 치밀했다.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전봉관 교수의 저서 ‘황금광시대(도서출판 살림)’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금 채굴을 장려하기 위해 금광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생산된 금은 고가에 매수하는 등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금을 캐내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금맥은 사실상 10년만에 바닥나고 말았다.

충청북도에서는 영동군 용화면 월전리와 황간읍 원촌리 등 10여 곳에 금광이 개발돼 ‘엘도라도’를 찾아나선 일본인들이 몰렸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이주는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1905년 개통된 경부선의 도내 구간은 영동 추풍령역을 시작으로 황간역, 영동역, 옥천역을 거쳐 대전으로 빠져나간 뒤 부강, 조치원역으로 이어졌다.

금광과 철도라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춘 영동지역에 일본인들이 몰린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충북학연구소가 발간한 20세기 전반 충북지역 인구통계에 따르면 1944년 영동군에는 일본인 936명(남 430, 여 506명)이 거주했다. 전체 인구가 비슷한 제천에 615명, 음성에는 257명이 거주한 것과 비교할 때 영동에 일본인이 몰렸다는 것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금맥에만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빨판을 들이대고 경제를 무력화시켰다. 영동군 향토사연구회 김기헌(81)자문위원은 “경부선 시설을 하면서 농장이나 상권은 물론 고리대금업까지 영동의 경제는 완전히 일본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증언했다.

월유광산, 광미처리에만 30억원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에 있는 월유광산은 1940년대부터 금과 은을 캐던 금속광산이다. 해방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조업을 하다 1998년 문을 닫았다. 현재는 광해복구사업이 90% 정도 진행된 상태다.

갱차(坑車)가 드나들던 입구를 콘크리트로 완전 봉쇄한 뒤 자연석으로 마감해 지금은 광산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광해복구사업의 핵심은 갱도 폐쇄가 아니다. 금이나 은을 제련하고 남은 찌꺼기인 이른바 ‘광미(鑛尾)’의 유해성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금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금광석을 곱게 빻은 뒤 비소, 황, 청산가리 등의 화학물질을 사용하게 되는데, 광미는 바로 이런 화학물질이 포함된 돌가루라고 보면 된다.

광미에는 또 각종 중금속 물질이 포함돼 있다. 광석에는 특정 광물질만 포함돼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금속성분이 들어있고 그 중에서 가장 경제성이 높은 물질만 제련하기 때문이다.

광해방지사업단 권혁주(39) 대리는 “금광석에는 보통 금·은·동 성분은 물론이고 다른 금속 성분도 포함돼 있다”며 “금광석의 경우 1kg에 금 0.07g만 나오면 채산성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광물질은 금방아를 찧고 난 뒤 광미와 함께 버리게 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금속광산 인근에서 ‘이타이이타이병’이나 ‘미나마타’병이 발생한 것도 카드뮴, 수은 등 광미의 오염물질로 인한 것이었다.

월유광산를 에돌아흐르는 하천 앞에도 금을 제련하고 남은 광미가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는데, 지금은 흙을 돋우고 잔디를 심는 작업이 한창이다. 겉으로 보면 흙더미지만 광미 위에 차단막을 덮고 2m 이상 복토를 한 것이기 때문에 빗물이 스며들지도 않고 침출수도 나오지 않는다. 광미 처리에만 30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갔다.

권혁주 대리는 “광산 하류에 살던 다슬기가 사라질 정도로 복구 이전에는 오염이 심각했는데, 지금은 다슬기가 되돌아와 주민들도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다.

   
▲ 금속의 제련에는 각종 화공약품을 사용한다. 충남 청양의 삼광광산에는 사용하고 남은 화공약품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

아름다워라 월유광산
월유광산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쓸쓸한 폐광촌의 모습을 떠올리면 오산이다. 월유광산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바위 암벽을 드러낸 월유봉의 자태와 맑은 물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오는데, 일찍이 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장하는 ‘한천8경’ 가운데 한곳이 바로 월유봉이다.

‘달이 쉬어가는 봉우리’라는 뜻의 월유봉은 우암 송시열이 그 화려한 경치에 반해 한천정사를 짓고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KBS 사극 ‘해신’ 가운데 일부 장면을 이 곳에서 찍기도 했다.

주민들도 광해복구사업이 마무리되는 것에 대해 큰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주변의 풍광이 수려하고 쏘가리 등 차고 맑은 물에 사는 민물어종이 풍부해 식당 등이 성업중이지만 금속광산이 있다는 것 때문에 아무래도 적지않은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과거 광미가 쌓여있었던 공간도 유용하게 사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복토한 부지 위에는 일반 건물을 지을 수 없는데, 주차장이나 공원 등의 용도로 사용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광해방지사업단 유행렬(43) 충청본부장은 “내년에는 월유봉을 병풍처럼 두른 복토 부지 위에서 ‘광산음악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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