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통일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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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통일을 믿지 않는다"
  • 박소영 기자
  • 승인 2008.09.18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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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환·이옥춘 노부부의 ‘잊혀진 고향’이야기
"내 나이 91세…죽을 날 가까웠으니 잊을 수밖에"
두터운 외투를 벗으려했던 북한이 다시 옷깃을 여미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빼앗긴 10년을 되찾겠다’는 선거 당시 대국민 구호가 공언이 아님을 너무 쉽게 보여줬다. 햇볕이 10년에 걸쳐 이뤄놓은 것을 바람이 순식간에 되돌려놓았다는 얘기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그 변화를 가장 뼈저리게 체감하는 것은 하염없이 상봉을 기다려온 이산가족들이다. 그 중에 100세를 눈앞에 둔 고령자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충북에만 90세 이상인 상봉대기자가 60명에 이른다. 통일부 산하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에 따르면 2008년 8월말 기준 상봉자 신청자는 12만 7285명이고, 그 가운데 사망자는 3만 5483명이다. 충북은 2746명으로 전체 신청자의 3%를 차지한다.
남북교류에 노둣돌을 놓았던 도내 지방자치단체들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바람이 잦아들고 다시 햇볕이 들기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마음들을 지면에 모았다.

   
▲ 사진=육성준기자

한종환(91)·이옥춘(83) 노부부의 고향은 강원도 양구군 수인면 인판리 바리골이다. 고향을 떠난 지는 올해로 꼭 70년째. 고향 윗동네 아랫동네에 살았던 이들은 24살, 16살에 부부의 연을 맺고, 38년 일제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중국 길림성으로 쫓겨나다시피 떠났다.

45년 해방 이듬해 부부는 조국을 되찾았다는 기쁜 마음에 세 살 난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어머니와 함께 서둘러 내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북에 있는 동생들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는 정말 몰랐다. 그 때 나이가 할아버지는 29살, 할머니는 21살이었다. 그 후 조국 땅에서 굴곡진 청춘을 흘려보냈다.

몇 해 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한 할아버지는 고향과 동생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동생 이름이 한종필, 살아 있으면 여든일곱이고 누이는 한보배, 한보희, 한봉녀인데 헤어질 때가 10살도 안됐지. 떠난다는 얘기도 못하고 왔는데….”

서울에 온 부부는 당시 묘동교회 터에 나무판대기로 일명 ‘학고방’을 짓고 생활을 시작했다. 오기 전 중국에서 사기를 당해 빈손으로 내려왔다. 1년 후 나무를 뜯어 장춘공원 근처 약수동에 손수 집을 지었다.

부부는 학교 청소부를 시작으로 남의 땅을 빌어 농사, 건설현장 막노동, 때로는 간장 장사를 하면서 끼니를 연명했다. 고된 노동으로 버틴 세월이었다. 그러다가 척박한 서울 생활 30년을 마감하고, 철원에서 농사 지며 22년을 더 살았다. 셋째 아들이 있는 청주시 비하동에 터를 잡은 건 11년 전이다.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남매들
한 할아버지는 자식욕심이 생겨 4형제를 두었고, 또 증손녀까지 봤지만 추석명절엔 찾아갈 곳 없다는 게 여전히 허전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향은 다 잊었어. 더 이상 기억하면 뭘 해.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는데. 이북에서 온 사람들 중에 성공한 사람도 있겠지만, 열심히 살아도 우린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어. 생활이 어려워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해 다들 어렵게 사는 것 보면 미안한 마음뿐이야. 다 뿔뿔이 흩어져 막노동을 하고 있지. 지금은 셋째 아들 집에 얹혀살면서 방 한 칸을 20만원짜리 사글세로 놓고 그걸 부부가 용돈삼아 쓰고 있어”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동생들이 여기 와 있다고 해도 아마 못 알아볼꺼여. 10살 미만 어린것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있나. 고향가도 이제 알아볼 사람도 반가워 할 사람도 없어”

   

가난과 이산가족 멍에 안은 70년

이옥춘 할머니는 그나마 10년 전 헤어졌던 여동생들과 연락이 닿아 한을 풀었다. 이 할머니는 “85년 KBS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상봉했잖아. 그 때 방송이 중국에서도 방영돼 그걸 본 막내 동생이 연락을 해왔어.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지 꽤 됐고, 둘째 동생은 연길에 셋째는 흑룡강성에 살고 있더라고. 서신교류를 하다가 89년에 직접 동생을 만나러 갔어. 2005년엔 동생들이 여기에 온 적도 있고, 또 인형공장을 운영하는 조카가 서울에 있어서 소식을 전해들고 있지. 난 소원 풀었는데 이 양반이 불쌍하지. 돌아가시기 전에 볼 수 있을는지.”라고 말했다.

“고향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호통치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울먹이며 가슴에 고이 묻어놓았던 옛 이야기를 꺼냈다. “내 구구절절한 얘기 들으려면 아마 한달도 모자랄꺼여. 그 세월을 어떻게 다 얘기한데. 사실 서울에 온 이듬해 전라도로 내려갔었지. 어떤 여자가 전라도 가면 돈을 벌수 있다고 해서. 남의 땅 빌어서 농사짓고 있는데 그 해 ‘호열자’라는 전염병이 돌았어. 그 땐 전염병으로 죽으면 아예 길을 차단하고 형제간에도 얼굴 보지 않는다고 했어. 근데 2월에 내려오신 어머니가 5월에 그만 병이 걸려 돌아 가신거야. 날이 밝아 지게에 죽은 어머니를 메고 나왔는데 길은 막혔지, 허허벌판이지 도저히 갈 곳도 어찌해야할지도 몰라 둑 한복판에 주저앉아버렸어. 혼자서 땅 파고 어머니를 묻었는데,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지금까지 한번 찾아가지도 못했어. 지금은 찾아봐도 어디가 어딘지 모를 텐데…”

힘겹게 얘기를 꺼낸 할아버지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기자에게 물었다. “이북이 더 가까워, 아님 중국이 더 가까워”라고. “가까운 이북은 못가도 중국은 쉽게 가 잖어. 우린 통일은 믿지도 않아. 죽을 날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다 잊는 거여.”

올해 남북 이상가족 상봉은 잠정적으로 중단됐다. 금강산 면회소가 올 7월 완공됐지만, 경직된 남북관계의 빗장이 풀리지 않아 2000년부터 광복절을 앞두고 해마다 펼쳐졌던 이산가족상봉은 올해 끝내 열리지 못했다. 노부부에게 차마 “죽기 전에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마시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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