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세레머니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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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세레머니의 유혹
  • 육성준 기자
  • 승인 2010.06.0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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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준 사진부 차장

당선자는 지지자들과 함께 꽃다발을 목에 걸고 보도진들을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포즈를 취한다. 피 말리는 개표방송이 시작된 뒤 서너 시간 후 당선자의 윤곽이 잡히면 신문·방송사들의 사진·카메라 기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후보자 사무실로 모인다.

곧이어 개표방송 자막에 ‘당선 확정’ 이란 글자가 뜨면 후보자와 당 관계자, 지지자, 가족들은 환호한다. 카메라 후레쉬가 연신 터진다. 이 한바탕 세레머니는 당선자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단 한 장의 사진이며 자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 청원군 국회의원에 출마한 자민련 오효진 후보와 한나라당 신경식 후보는 선거 초반부터 여론 조사 결과 오차 범위 내의 각축전을 벌였다. 드디어 선거 당일 개표가 시작됐다. 개표 중간쯤에 오 후보가 몇 백표 차로 앞서고 있었다.

▲ 떨어질 것이란 예측에 급하게 나온 신경식 후보는 꽃다발도 준비하지 못한채 지지자들과 당선 세레머니를 했다. 카메라 Nikon F4, 렌즈 17~35mm
이후 개표방송엔 ‘당선유력’이란 자막이 떠올랐다. 이내 오 후보 선거 사무실로 모든 지방 신문·방송 기자들이 찾아갔다. 우리는 ‘꽃다발 준비는 됐느냐, 환호하는 자리는 이곳에서’ 등 취재진들은 선거 관계자와 나름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문제는 후보자였다. 세레머니는 개표가 다 끝나면 한다는 것이다. 상대 후보를 앞서는 상황이지만 격차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감에 쫓긴 취재진은 그래도 딱 한번 만 연출 하자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오 후보는 진지한 얼굴로 개표방송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피 말리는 건 후보나 기자나 마찬가지였다. 개표가 후반부에 이르자 취재진들 사이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상대 후보인 신경식 후보가 다시 앞선다는 소식이었다. 한 면에서 거의 몰표가 나왔다는 전화였다. 전세가 역전 된 것이다. 우리는 신경식 후보 사무실로 급하게 달려갔다.

그러나 사무실은 썰렁했다. 개표 중반쯤에 이미 떨어질 것이란 예측으로 몇몇만 남아 있을 뿐 신 후보 역시 집으로 가고 없었다. 급하게 연락해 지지자들과 함께 당선 세레머니 사진을 어렵게 찍었다. 꽃다발도 없었다. 당시 두 후보는 재검표까지 벌인 결과 표차가 불과 16표였다.

이후 청원군수를 역임한 오효진 씨는 고향에 있다고 한다. 그 당시 흐트러지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그 당당함에 박수를 보낸다. 만약 세레머니를 했다면 기자는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당선 세레머니는 사진기자들에게 참기 힘든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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