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영화를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속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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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영화를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속였나
  • 충북인뉴스
  • 승인 2015.04.0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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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이 아닌 우울한 회색빛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 김규원 위원

애매한 팝콘
김규원 충북발전연구원 연구위원

속았다. 누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했던가. 영화를 보고난 나의 느낌은 포르노는 커녕 애로물 수준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나의 성인물 감상 수준이나 경험이 다양하고도 깊기는 하지만) 아무튼 전반적인 영화느낌은 회색이고 우울하다. 제목의 그레이는 남주 크리스찬 그레이(제이미 도넌)의 이름에서 연유하지만 원작자 E L. 제임스의 말처럼 흑백을 구분하기 힘든, 애매한 뭐 그런 의미도 있단다. 이 점에서 ‘모든 것은 회색이며 오로지 영원한 것은 생명의 나무’라는 파우스트 메피스토텔레스의 유혹이 떠오른다.

전반적으로 우울하다

▲ 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감독 샘 테일러-존슨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4살 때 마약중독에 창녀였던 친엄마의 사망 그리고 입양, 15세쯤 엄마 친구의 성추행(영화 졸업의 로빈슨 부인같은)으로 인해 형성된 가학과 피학을 넘나드는 성적 취향, 그리고 우연히 만난 아나스타샤(다코다 존슨분, 아나스타샤에는 능력이라는 의미가 있단다. 어떤 능력인지는 영화에서 확인하시길)에게 자신의 성적 취향과 습관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적 행위 그리고 이를 뒤따르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구적 이데올로기 정도라고 할 수 있으리라.

멋진 자동차를 선물한 직후에 눈동자를 굴렸다고(차를 선물한 자신을 안보고 다른 곳을 봤다는 의미겠지)여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엉덩이를 때리는 행위(사실 멋진 차 한 대 얻는 대가치고는 싼 것 아닌가? 천박하다고?)는 이 곳 한국에서는 초등학생들에게도 금기시하는 행동이련만, 저 선진화 됐다는 미국에서(물론 서부의 시골 시애틀, 실리콘벨리만 있을 뿐 사람답게 만드는 전통 문화와 가치가 없어 보이는)조차 예전 3,40년전 우리네 모습(물론 애인이 아닌, 부모 자식간에 행해진 가정폭력 좋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좋게 말해서 사랑의 매였지만)을 보았다.

1920년대 러시아의 행동주의 심리학자 파블로프의 실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보상과 처벌은 심리학계에서 60년대까지 스키너의 단골 주제였고 이러한 실험실 상황에서 만들어진 이론적 바탕들은 미국사회의 매체폭력은 물론 신자유주의적 정책들, 아시아와 남미의 신생정부를 콘트롤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재밌는 것은 한국에서 2월 개봉이후 36만명이 봤다는데 언론에서는 엄마들의 포르노니 하면서 호들갑이다. 이른바 봐서는 안 된다는 식의 숨겨진 의지와 고집이 느껴진다. 엄마들은 포르노 보면 왜 안 되나? 모성보호나 가정보호 차원인가? 언제부터 엄마, 즉 성인 여성의 개인적 취향도 국가가, 사회가 언론이 관리했던가. 소심하게 말해서 이 영화를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남성중심주의자 혹은 가부장제 옹호자로 봐도 될듯하다.

부끄럽게 말해서 성인영상사업의 대부분의 고객층이 남성이라는 점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포르노는 가뭄에 콩나 듯 있을 뿐이고 남성들에게 지루하고 답답해서 화를 나게 만든다.

그래도 폭력은 싫다

아름다운 해변이 보이는 통유리창의 빌라에서 카메라는 천천히 돌아가고, 젊은 시절의 아놀드 슈와츠네거 수준의 근육질의 남성이 아니어도 김우빈 정도의 눈매와 현빈의 미소, 원빈의 옆모습을 지닌 남성이 나타나서 천천히 입술을 자신의 이마(혹은 발가락)부터 애무를 하는 것은 기존 남성들이 보던 즉 상대 여성을 보자마자 벗기고 눕혀서 이른바 강간신화를 옹호하고 찬미하는 형태의 것과는 무지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나치독일이 탱크를 앞세우고(단연코 성적 묘사 아님) 벨기에 숲을 통과하던 그런 속도전이 곧 사랑이었고 간혹 폭력으로 퇴화하던 시절의 추억일 뿐, 이제는 가정폭력 피해여성이자 민간인인 서정희씨와 자칭공인 서세원씨의 사건을 통해서 더 이상 용납되지 않고 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곤혹스러움이 결국 이러한 표현을 낳은 것이 아닐까.

오빠 믿지? 손만 잡고 잘께의 한국식 에로영화의 논리는 이 영화에서 그대로 빙의된다. 나를 믿지? 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은 요즘 ‘가족끼리 왜 이래’식으로 부부간에도 멀쑥해지는 한국식 부부들의 모습처럼 각방을 쓰게 해 영화 속에서는 섹스는 해도 잠은 같이 안자는 모습으로 이 영화 속에서는 나타나서 또 한번 한국인으로서 위대한 한류의 결과를 맛보게 한다. 멋진 대한민국이다. 실크로 만든 눈가리개, 붉은 색 노끈, 채찍, 깃털이 보여주는 환상은 너무도 짧다. 아울러 이러한 도구들은 결국 캐나다의 사회학자 마살 맥루한이 말한 인간 신체의 부족함을 대체하려는 것처럼 눈의 연장으로서 안경, 피부의 연장으로서의 옷, 발의 연장으로서 신발과 자동차처럼 성적 쾌감을 증대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였고 여자는 느리고 남자는 급하다는 중학생 때의 성교육이 진리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영화 사이 사이 파찌올리 피아노와 엘리 굴딩의 Love me like you do,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 5번, 쇼팽 프렐류드 4번은 영화를 세련된 흑백 영상으로 기억하게 한다. 고교시절 알미늄 야구방망이로 담임선생님에게 반 전체 아이들이 10대 이상을 맞았던 기억은 물론 군 복무시 꼬질대라는 포탑 청소용 쇠파이프로 구타당한 기억이 생생한 나는 아무리 쾌감을 증가시켜준다고 해도 폭력은 싫다. 하지만 타인의 성적 취향은 존중하련다.

그래서 나는 제목의 회색이 좋고 아울러 의사라면 읽어야하는 3대 고전의 하나인 헨리 그레이의 저서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그레이가 떠올랐다. 어차피 인생은 헤르만 헤세의 시처럼 안개 속을 헤메이는 것이고 결과는 결국 하나이다.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오늘을 즐기라는 것인데 죽음이 아닌 실업과 불경기 그리고 지역차별을 기억하라 그리고 오늘을 기억하라고 바꾸어야 하나? 슬로건은 공허하고 콘텐츠는 따로 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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