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이모작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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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이모작을 생각하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15.05.2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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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동화로 바꾼 영화 <트래쉬>

애매한 팝콘 / 김규원 충북발전연구원 연구위원

▲ 트래쉬 Trash , 2014
감독 스티븐 달드리
출연 루니 마라, 릭슨 테베즈, 에두아르도 루이스, 가브리엘 와인스타인

경찰이 소년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있다. 장부 때문에. 누군가 소년에게 물었다. 그 일을(어떤 일인지는 영화를 보시길)왜하느냐고. 소년은 그게 옳은 일이니까라고 말한다. 이 순간 영화는 냉혹하고 모순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한 표현물에서 어린이용 동화로 판을 바꾼다. 빌리 엘리옷의 감독 스티븐 달드리가 앤디 멀리건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트래쉬>는 그래도 우리 영화팬들은 <어벤저스2>의 양적, 질적 물량 공세를 대체할만한 액션과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평을 한다. 동화 같지만 재미있다.

G.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묘사된 것처럼 남미의 국가들이 유럽의 문명에 비해 낙후된 것이 철기 문명과 질병의 면역성 부재 때문일까? 남미에서 유일한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은 고맙다는 뜻인 오브리가도와 그라시아스만큼이나 인접 남미국가들과는 다른 문화적 특성이 있지만 영화 <트래쉬>에서는 심각한 빈부격차, 인종의 용광로, 카톨릭의 무기력한 영향력, 공권력의 폭력성, 인권의 개판 5분전식 무시 등에서는 전혀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남미는 왜 이다지도 비슷할까.

메이저 제작사가 만든 영화

<트래쉬>의 간단 줄거리. 영화는 브라질 리우 시장 선거에 나가려는 상원의원 토마스는 자신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호세(Jose)안젤로가 천만달러의 현금과 비자금리스트를 가지고 사라지자 광분하고(차분히 대응하겠다고? 응? 지금이야 그렇겠지), 경찰을 동원해서 찾는다. 쫓기던 호세는 현금이 숨겨진 비밀을 풀 물건이 있는 지갑을 길 아래로 던지고 체포되고 살해된다.

한편 지갑은 쓰레기 수거차 위에 떨어지고 쓰레기 하치장에서 재활용품을 수거해서 먹고사는 가난한 하파엘의 손으로 들어간다. 하파엘(릭슨 테베즈 분, Rafael에서 R을 리을 발음이 아닌 히읗 발음하는 것과 유사한 웃기는 사례 소개: 유명 K고 출신의 우등생이 미국에 갔는데 남미 출신 이민국 직원이 어디 가느냐 묻길래 산 조세(San Jose)간다고 했더니 이 직원이 산 조세가 아니고 산 호세다라고 했단다. 스마트한 K고 친구, 언제까지 머물 것이냐는 이민국 직원의 질문에 June or July를 훈, 훌라이라고 했다는 에피소드, 아무튼 잘난 척은 여기까지. 켁)은 경찰이 지갑을 찾기 위해 빈민촌에 들이닥치자 가르도(에두라르도 루이스 분), 하토(가브리엘 와인스타인 분)등과 함께 경찰을 피해 지갑에 숨겨진 비밀을 찾기 위해 이러저런 위험을 감수하며 영화는 자연스럽게 결론을 향해 질주한다.

폴 빌브리오가 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독일군이 벨기에 아르덴숲을 전차로 전격 질주하던 것을 모델로 하여 현대의 문명이 오로지 테크놀로지의 속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한 것처럼 이 영화 역시도 빠른 속도로 자본의 속성(독점, 부패, 폭력)을 동화적 관점에서 아주 효율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해석을 하고 그런 방식을 차용해서 결론을 맺지만 놀랍지도 않게 제작배급사는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인 유니버설 영화사이다.

연대를 통한 또다른 폭력

아이들이 영화 속이지만 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은 연대를 통한 또 다른 폭력이다. 약한 아이들의 입장은 당연히 힘을 합치는 연대가 필요하겠지만 다른 폭력으로 폭력에 대항한다는 논리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이며 단순하다는 생각에 영화적 혹은 문학적 상상력의 한계를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단순함, 혹은 뻔함의 식상함을 넘는 방식은 무엇일까. 동아시아문화도시처럼 이벤트로 할까? 어림도 없는 말이다. 원칙으로 회귀해야한다.

요즘 다들 직업 이모작을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의식인 마음의 이모작은 말 안한다. 우리 사회나 브라질 영화에서나 바퀴벌레로 표현되는 빈민가의 아이들을 보면서 학교밖 청소년 혹은 이러저런 사회문화적 다양성에 속한다는 것으로 인해 편견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내가 한 것은 무엇인지 재미있게 스릴 넘치게 영화를 본 후 정신의 이모작 즉 새롭고 보강된, 정제된 가치관을 정립하겠다고 반성했다.

그러나 물질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미운 놈, 못난 인간에 대한 구별을 최대한 없애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비 혹은 반인간적인 행위이다. 수많은 개미들이 부딪치지 않고 먹이를 운반하는 것은 자아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곤충학자들은 말한다.

자아를 찾는 것이 결국 나와 남을 구분하는 원동력이고 차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경쟁적, 포식적, 배타적, 이기적, 가식적에서 반대의 영역으로 이동해야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을 위해서가 되야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빈민가 아이들을 다룰 때의 시선은 가급적 객관성을 유지해야하며, 간혹이라도 눈물을 보이는 것은 1차원적 감상이라는 점에서도 유의해야 한다.

아이들 나름의 삶에 대한 존중이 아닌, 값싼 동정이라는 점에서도 억제되어야 한다. 영화의 끝부분에 보이는 돈벼락, 돈 날리기, 하하하 거참 부럽다. 아울러 영악하다.(궁금하다면 이메일로 묻는 센스) 또한 물고기를 든 장면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의존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던져 주는게 아닐까.(아님 말고)

한편 브라질 리우 빈민가의 모습은 우리의 몇십년전 모습일까 아니면 멀지 않은 미래, 빈부차이의 극대화 이후의 모습일가? 가톨릭 신부로 나온 마틴 쉰을 보면서 나이를 들면 주연보다는 값진 조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오늘, 여기서 생각을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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