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독립투쟁의 시발점 이상설
상태바
무장독립투쟁의 시발점 이상설
  • 충북인뉴스-김남균 기자
  • 승인 2017.03.17 0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09년 중국 미산(밀산·密山)에 한흥동 세우고 군대 양성
안창호, 1년뒤 ‘십리와’ 기지촌 건설…홍범도 장군도 합류

흔히들 역사는 승리한자의 기록이라 말한다. 이 말은 기록된 역사가 꼭 객관적 사실만 반영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을사늑약 이후 한국 영토를 벗어나 최초로 무장독립투쟁 기지를 건설하고 임시정부를 세운 보재 이상설 선생.

그를 만나는 주변 곳곳은 매우 초라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시 수이푼 강가. ‘솔빈강’ 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강에 그의 유해가 뿌려졌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운동가의 여한을 담은 이 강에 대해 러시아 고려인들은 ‘슬픈 강’이라고 불렀다.

미쳐 봄은 오지 않았지만 독립운동가의 유허비로 가는 짧은 길은 진흙 뻘로 질척거렸다. 유허비 주변엔 사람도 없었고 인가도 없었다. 장마가 지나고 난 뒤 강가 버드나무에 걸려 나부끼는 비닐처럼 황량한 벌판에 외로이 서있는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魂)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그의 유언대로 유허비는 발해산성을 바라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

기록된 역사, 한흥동(韓興洞)

역사는 항상 대척점에 서있다. 불태우는 자가 있으면 새로 기술하는 사람이 있다.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이 있으면 기억하려는 민중들의 한 맺힘이 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나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속에도 역사는 살아남았다.

“역사는 최초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중국 미산(밀산, 密山)시 전 부시장 맹고군 씨는 이렇게 말했다.

맹 전 부시장은 조선족이다. 한민족은 러시아에서 까레이스키, 즉 고려인이 되고 중국에서는 조선족이 된다. 그가 말한다. “최초성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이상설 선생은 무장독립운동가다. 독립운동인데 그냥 독립운동이 아니고 무장독립투쟁이다.”

그는 최초성에 주목했다. 맹 전 부시장이 말하는 최초성. 그것이 바로 보재 이상설 선생이다. “이상설 선생은 이론을 최초로 실천한 사람이다. 양기탁(1871~1938·독립운동가·언론인), 안창호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청도(칭따오)에 모여 토론을 하지 않았나. 토의 결과 무장독립투쟁을 하기로 결정지었다.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 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다 실천했나? 최초로 이상설이 실천했다.”

그가 말하는 ‘최초성’의 중요함은 연결성에 있다. 나비효과에 등장하는 작은 날개짓이 세상을 뒤엎는 폭풍과 해일이 되는 것처럼 최초성은 다른 움직임을 자극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에 영향을 미쳤다. 이상설 선생의 실천이 없고 경험이 없었으면 발전하지 못했다. 역사의 위대성이 바로 이것이다. 최초가 있으니 후대의 실천이 있었던 것이다. 봉오동 청산리 주력이 누구냐? 김좌진, 서일,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 장군이 어디서 성장했나? 바로 이상설 선생과 안창호 선생이 세운 (미산시) ‘한흥동’ 기지와 ‘십리와’에 와서 배웠다. 이상설 선생이 세운 한흥동 기지에서 사람을 모았고 훈련했다.”

맹 전 부시장은 역사학자다. 발로 뛰며 자료를 찾고 사실을 찾아 기록했다. 그런 수고스러움을 통해 ‘밀산시조선족백년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7)가 나왔다.

그가 말한다. “(역사에서) 이론을 내세우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실제로 (홍범도 장군이나 김좌진 장군처럼) 무장독립투쟁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건설한 미산시 한흥동 기지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싹이 자랐다.”

그에게 연구와 기록의 대상인 역사는 이렇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역사는 최초를 연구하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관에 가보니 ‘한흥동’과 ‘십리와’가 없다. 유감이다.”

무장독립투쟁의 시발점, 미산

중국 헤이룽장(흑룡강·黑龍江)성에 위치한 미산시는 을사늑약 이후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시발점이다. 1909년 보재 이상설 선생이 이곳에 처음으로 한인촌을 세우고 군대를 양성했다. 그가 세운 마을 이름은 한흥동(韓興洞). 한민족을 부흥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1910년에는 칭따오(청도) 회의 결과에 따라 이곳 십리와(十里와)에 한인 기지촌을 건설했다.

봉오동 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은 이곳에 학교와 무관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13년 홍범도 장군은 이곳 한흥동에 밀산무관학교를 세웠다. 동명학교와 한민학교가 세워졌다.

1909년 이동녕·이동휘·안창호·양기탁 등 신민회 주요 인사들은 상동교회에서 비밀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해외독립군 기지와 관련된 내용이 논의된다. 이후 1910년 3월 신민회는 중국 청도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독립전쟁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어 미산에 약 300만 평의 토지를 사들이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해외에서 한인들을 군사 교육시킨 교육기관의 효시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보다 1년 앞서 보재 이상설 선생이 한흥동 기지촌을 건설했다. 맹 전 부시장에 따르면 1909년 이상설 선생의 명을 받은 이승희가 밀산부의 봉밀산 아래 흥개 호반에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여 100호를 정착시켰다. 토지구매자금의 대부분은 모금을 통해 이뤄졌다. 모금은 중국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는 교민들을 대상으로 이뤄졌고 국내에도 사람을 파견했다. 원동임야주식회사를 통해 주식을 사게 하는 방법도 동원했다.

미산은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했던 부대들이 모여 결성한 대한독립군단(총재 서일)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제는 대량의 토벌부대를 조직하고‘경신대토벌’ 작전을 감행한다.

이에 1920년 12월 홍범도 장군의 부대를 위시로 한국민회군, 독군부, 신민단, 의군부, 대한정의군정서, 광복단, 야단, 혈성단 등 10여개의 항일무장투쟁 부대가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총재에는 서일이 선출됐고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이 선임됐다. 대한 독립군단의 병력은 3개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 3500여명의 병사로 구성됐다.

한편 미산시에는 ‘십리와’와 서일 장군이 돌아가신 자리에 ‘서일총재항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올해에는 보재 이상설 선생이 세운 한흥동 자리에 기념비가 들어설 예정이다. / 충북인뉴스 김남균 기자무장독립투쟁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