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정치, 그러나 이런 신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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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정치, 그러나 이런 신의도 있다.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4.10.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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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김택현, 노덕선의 40년 정치동행

올해 호적 나이 73세(1931·6·10일생)로 17대 국회의 최고령인 이용희의원(열린우리당·보은옥천영동)은 또 다른 기록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의 보좌관을 무려 40년동안이나 채용한 것이다. 이용희의원의 정책보좌관인 김택현씨(58)와 노덕산씨(56)씨는 각각 40년과 32년 동안 이의원과 함께 했다. 이들 두사람의 얘기는 이의원이 무려 19년만에 다시 금배지를 단 지난 총선 때 이미 주목받았으나 최고령 당선자인 주군의 ‘빛’이 너무 강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정치판에서의 배신은 무죄라고 했다. 어제의 동지가 졸지에 원수로 변해 서로 비수를 겨누고, 선거 때 부나방처럼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것이 상식이 되다시피한 우리나라 정치풍토에서 40년과 32년의 정치동거는 분명 이단(異端)이다. 이들의 얘기는 눈만 뜨면 으르렁대는 정치인들에게 과연 어떻게 비쳐질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고난의 정치인에겐 고난의 보좌관

   
▲ 김택현 보좌관
김택현보좌관이 이의원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청주공고)를 졸업하고 고향인 보은에서 태권도도장을 열어 갓 사회생활을 한 무렵이다. 당시 정당에 속해 있던 학교 선배의 소개로 지구당의 조직책을 맡으면서다. 때문에 햇수로만 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프로급이다. 그 스스로도 “정치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정치로 삶을 정리해야 할 판”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용희의 오른팔로 나선 시기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처남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육인수씨와 맞서 이의원이 6, 7, 8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내리 낙선한 신고(辛苦)의 시절이었다. 1960년 제3대 충북도의원에 당선됐다가 5·16쿠데타로 의회가 해산된 후 본격 야당생활을 시작, 참여정부가 출범하기까지 ‘영원 한 야당인’으로 살아 온 이의원을 보필한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다. 그는 “미행 감
   
▲ 노덕산 보좌관
시 도청은 다반사였고 툭하면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당했다. 선거 때도 일부 투표소엔 참관인을 들여 보내지 못할 정도로 살벌했다. 육신이 괴로울 땐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후회스럽기까지 했지만 결국 의원님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택현보좌관보다 8년 늦게 이용희 패밀리에 합류한 노덕산보좌관의 경우는 더 극적(?)이다. 현재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박기열씨가 농협중앙회의 하급 간부로 일할 때 그의 추천으로 1973년 9대 국회 때 이의원과 연을 맺게 됐다. 고향인 경기도 문산에서 영업용 택시를 몰다가 이의원의 차량을 맡아 수행비서로 정치판에 들어 온 것이다. 당시 영업용 택시로도 먹고살기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기대 반 호기심 반의 설레임으로 비서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의원 나리’를 모시는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고, 결국 여러번 떠날 것을 다짐했지만 그 때마다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까지 남았다. “영업용택시를 할 땐 하루 일하고 하루 쉬었기 때문에 자기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의원님을 수행하면서 내 사생활은 엄두도 못냈다. 어디를 가든 항상 기다리는 삶의 연속이었고, 마음의 여유조차 찾기 힘들게 됐다. 그래서 언젠간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뒀지만 마음뿐이었다”고 그는 밝혔다. 후원회장 박기열씨는 이의원이 9대 국회에서 농수산위로 활동할 때 소위 인사청탁(!) 관계로 처음 만났는데 둘간의 관계도 30년을 훌쩍 넘겼다.

인간적 신의가 세사람 묶어
이들 두 보좌관이 32년, 40년동안이나 이의원의 오지랖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단 한가지다. 이의원에 대한 신의가 번번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단순하게 직업으로만 인식했다면 국회의원 떨어졌을 때마다 이미 그분과 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잡아 놓는 그 무엇이 항상 있었다. 국회의원 할 때나 안 할 때나 늘 우리에게 똑같이 대해줬고 정치적 소신못지 않게 변함없이 사람들을 챙기는 그 의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분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을 보면 인간적 도리가 아니라는 죄책감에 결행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밝히는 이의원의 최고 덕목은 ‘인간미’다.
“한번은 의원님의 집을 찾았는데 신문을 펴들고 눈물을 훔치시길래 깜작 놀랐다. 알고보니 권투경기 도중 사망한 김득구의 기사를 보고 우는 것이었다.” “누가 우리 보좌관들에 대해 음해라도 할라치면 본인의 책임을 먼저 얘기한다. 천성적으로 베풀기를 좋아한다.”(김택현) “1980년 신군부에 끌려가 중앙정보부 서빙고 분실에서 52일간이나 감금된채 고생하다가 풀려났는데 대뜸 우리걱정부터 먼저 하는데 앞이 캄캄하더라. 들어 갈 땐 73㎏였는데 나오실 땐 56㎏로 줄었다. 그 때를 잊지 못하겠다.” “일단 돈을 맡기면 지출과정은 묻지 않고 남았느냐, 부족하냐만 묻는다. 처신에 있어 YES와 NO가 분명하고 되면 되고 안 되면 안되는 성격이다.”(노덕산) 이들 두사람의 인간 이용희에 대한 평가는 이외에도 자지러질 정도로 많았지만 이를 그대로 옮기기가 언론으로선 되레 조심스럽다.

“이의원에겐 남다른 뭐가 있다”
어쨌든 이의원은 알만한 사람들한테 천생 정치인으로 통한다. 선이 굵은 처신 때문에 고령의 핸디캡도 묻히는 것이다. 6, 7, 8대 총선에서 내리 낙선하고 다시 도전한 9대 총선에선 당 총재(유진산)의 미움을 사 공천도 못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한참 정치에 이력이 붙을 10대 총선 땐 역시 당총재(이철승)의 사감으로 복수공천되는 황당한 일을 당하고도 결국 당선되고 만다. 같은 당에 복수 공천한다는 것은 둘다 망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1대에선 신군부에 끌려 다니다가 정치규제로 출마하지 못했지만 1985년 12대 총선에선 다시 보란 듯이 재기해 제 2의 정치인생을 누리게 된다. 이렇듯 평탄치 못한 이의원이었기에 당연히 그 보좌관들도 순탄치 못한 궤적을 이어왔어도 세 사람은 한번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특히 노덕산보좌관은 지금까지 수행비서를 놓은 적이 없다.

이들의 관계는 이의원이 야인이었을 때 오히려 더 돈독했다. 11대 때 출마하지 못한 이의원이 (주)진로의 고문으로 들어 가자 김보좌관은 이 회사의 홍보팀장으로 영입돼 옆을 지켰다. 그러나 13대 총선에선 실패했고, 역시 이의원의 주선으로 모 유통사업단에 적을 두게 됐지만 이의원과의 교류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 14, 15, 16대 총선과 도지사 선거땐 회사에 장기 휴가를 내고 이의원을 도운 것이다. 이의원은 주변 사람들한테 이들 두 사람을 재산목록 1위로 친다. 그만큼 서로간에 각별한 믿음을 쌓은 것이다. 본인들은 정치의 신의와 의리를 소중히 했다고 한다. 9대 때 최연소 보좌관이었던 김택현씨는 지금 17대에선 최고령 보좌관이 됐다. 최고령 국회의원에 최고령 보좌관, 17대 국회의 또 다른 관점이다. 여하튼 이들 보좌관을 32년, 40년이나 곁에 둔 이용희의원에겐 분명 ‘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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