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과 농담, 그리고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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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과 농담, 그리고 재미
  • 충청리뷰
  • 승인 2019.12.2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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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수필가 정호경의 『해 저문 날의 독백』
정 재 홍 수필가
정 재 홍 수필가

 

수필가 정호경은 1931년에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31년이면 조선땅을 지배하던 일본이 만주까지 단숨에 집어삼키던 옛날이니 그때 태어난 이 작가는 지금 한국 문단의 대선배이며 큰 어른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학평론가 김우종 선생의 표현입니다.

“문학은 괜한 겉멋이나 단순한 취미로만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문학에 대한 자기 소질을 확인하면 국내외의 문학작품을 두루 섭렵하라. 그렇게 기반이 튼튼히 다져진 연후에 작품 창작에 임해야 할 것이다. 욕심만 있을 뿐 문학에 대한 소질이 안 보이면 자신의 적성에 맞는, 다른 길을 얼른 찾아야 할 것이다.” 후학들에게 전하는 이 말씀은 저 또한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랐습니다. 내 어릴 적 소꿉놀이터는 아버지의 서재였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책장만 신나게 넘기는 일’이 나의 일상 놀이였던 겁니다.

당신께서는 ‘초등학교 다닐 때 집 마루에 굴러다니던 이태준의 단편집 『돌다리』를 읽으면서부터 작가로서의 운명이 시작됐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 이청준의 『매잡이』를 읽으면서 작가의 길을 가고싶어 했지 싶습니다.

당신께서는 ‘나 혼자만이라도 맑고 밝은 웃음 속에서 진실하고 재미있는 수필을 쓰면서 살아가려고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2019년 미수(米壽)의 연세로 문력(文歷) 46년이 되는 한국 수필문단의 원로 정호경 선생은 필자인 저의 아버지 되십니다. 세간에는 호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지만, ‘글’보다 ‘사람’이 행세하기 쉬운 우리 문단을 올곧게 지키는 수필대가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에는 해학이 풍부한 농담으로 늘 화기애애합니다. 구수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당신의 입담에 오르면 웃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 수필의 맛은 이런 데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입니다. 누가 됐건 먼저 문학 정신에 입각한 기본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학은 어느 장르나 제 나름의 형식이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산문으로서 짧은 수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문장’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나 소설과는 다른 수필문학으로서의 기본인 문장 수련부터 시작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하며 말씀하십니다. ‘수필은 체험을 통한, 진솔한 고백문학’이라고 합니다. 수필은 사물에 대한 설명문도 아니고, 자신이 겪은 체험이나 들은 이야기를 말하는 체험담이나 보고문도 아닙니다. 수필은 자신이 겪은 사실과 상상력이 어우러져 문학적으로 승화된 하나의 작품을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수필은 체험을 통한 진솔한 고백문학
이러한 수필에 대한 생각의 바탕을 염두에 두고 당신의 수필집을 읽다보면, 꾸밈없는 작가의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문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품마다 삶의 진실은 치밀하며 날카롭게 묘사됩니다.

그러나 한 편 짧은 글속에서도 비유를 통한 예리한 촌철살인의 사회풍자가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읽는 이의 심금을 울려주기도 하고 통쾌한 짜릿함으로 전율을 느끼게도 합니다. 무심코 지나가는 인생의 여러 모습을 따뜻하게 감싸는 수필가의 마음이 우리를 훈훈하게 합니다. 작가의 문체는 특히 군더더기를 과감하게 줄인 깔끔하고 섬세함이 돋보이기에, 독자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해 저문 날의 독백 정호경 지음 다룸과이룸 펴냄
해 저문 날의 독백 정호경 지음 다룸과이룸 펴냄

 

‘재미있는 글’이라는 말에는 반드시 ‘쉽다’는 말이 앞선 ‘쉽고 재미있는 글’이라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의 ‘문장수련’이 있어야 되는 일입니다. 시의 정지용, 소설의 이태준, 수필의 피천득 작가의 글에서 우리가 재미를 느끼고 감동하는 것은 오랫동안의 각고 끝에 얻은 자연스럽고 세련된 문장으로 읽히기 때문이며, 이는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 말하듯이 쉽고 재미있게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정호경의 수필은 가장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만을 골라 자연스럽게 엮어냈기에 탁월한 흡인력을 갖습니다. 어려운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꾸미지 않습니다. 천진하게 세상의 진실에 도달하는 순수의 문장을 우리는 오래 곱씹어 음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물과 인간의 풍경을 특유의 해학미 넘치는 시선으로 읽어내는 해학수필가로 널리 알려진 수필가 정호경, 당신의 삶의 마지막 정리마저도 경쾌하고 유쾌하기에 살아오신 삶은 더없이 아름답다 하겠습니다. 노수필가의 이렇듯 담담한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해 저문 날의 독백』처럼 귓가에 아슴하게 스며 잔잔한 울림을 전합니다. ‘한 해는 저물어가는 것이 아니고, 한 해가 여물어가는 것’이라던 문장이 생각나는 시절입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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