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증, 그 불온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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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감증, 그 불온함에 대해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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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 규 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국장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자연의 민감한 아우성에 절로 흥이 나고 가는 봄을 행복하게 배웅할 수 있어 나는 참 다행이다. 그리고 나는 참 다행이다. 기쁨과 슬픔에 대해 반응할 수 있어서 그렇고, 순간순간 행복해하고 그리고 분노할 수 있어 다행이다.

대충대충 살아 갈 수 없는 예민함과 소심함으로 인해 “세상 참 까칠하게 사네” 라는 애정어린 비난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그렇다, 나는 세상을 참 까칠하게 바라보고 세상에 대해 까칠하고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저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라는 고정된 이미지가 세상을 불편하게 한다 해도 나의 예민함, 혹은 소심함은 언제나 연대를 갈망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긍정하는 연대에 목말라 한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 불편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있고 관심을 넘어 그들의 삶을 나의 삶으로 살았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희망하는 것, 꼭 그만큼 절망이 따라 붙는다. 나를 절망케 하는 것들 중의 하나를 말한다면 나는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변하는 낯색들이 불편하다. 그 낯색들은 언제나 계산속에서 살고 있으며 작은 이익 따위에 민감성을 발휘한다. 타인과 공동체의 위기에 대해서는 탁월한 불감증을 갖고 있으면서 말이다.

불감증은 불온하다. 그 불온함은 언젠가는 계산속에 살고 있는 낯색들에게 치명적인 덫이 될 터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덫이 그들만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기에 나의 소심함은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진다.

수동 달동네의 고단한 노인들의 발걸음과 사교육 따위는 엄두도 못내는 가난한 부모들, 일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해고된 노동자들, 아스팔트 농사에 꺼져가는 한숨을 내쉬는 농부들, 문턱을 없애도 일상이 된 차별에 시달리는 장애인들, 내 자신이며 이웃들인 그들의 삶이 더 이상 수난 받아서는 안된다.

절망적인 현실이 도래해서는 안되기에 만성불감증인 낯색들을 보며 나는 절망한다. 내몰리고 방치되어지는 우리들의 힘없는 이웃들이 나를 불편케 하는 낯색들보다 먼저 쓰러져 버릴 것 같아 두렵다.

차 팔고 전자제품 팔아 재벌들의 지갑을 채워주자고 힘없는 이웃들에게 쓰나미 같은 한미FTA를 강요하는 정치꾼들의 낯색들보다 불감증에 걸린 사회의 불온한 공기에 숨이 막힌다. 미래의 전쟁터를 방지하기위해 평화롭게 살고자 싸우고! 있는 평택의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우리의 낯색이 부끄럽다.

되돌릴 수 없는 생명에 대한 학살, 새만금을 절망케 하는 개발논리를 앵무새 떠들듯 받아 적는 그 낯색들이 나를 못 견디게 불편하게 한다. 노동자 중심, 장애인 중심, 서민중심 하며 ‘중심’운운하는 낯색들은 결코 노동자인적 없고 장애인인적 없으며 서민일리 없다. 언제나 대상화 하는 가운데 ‘중심’이라며 가르치려 들 뿐.

그래서 나는 배제하지 않기로 했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기위해 불편한 낯색들을 인정하고 심지어 긍정하자며 “그래 결심했어”를 외친다. 함께 살아야겠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 낯색들의 불감증, 그 불온함에 대해 예민하게 말하고자 한다.

기쁨과 슬픔에 대해 반응하는 감수성으로 불온한 불감증이 치유될 수 있도록 더욱 더 세상을 소심하게 바라보고 까칠하게 떠들어야겠다. 그리고 수동 달동네를 오르는 노인들의 발걸음으로 살아야겠다. 함께 살아야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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