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만 하면 나오는 ‘남명증도가’ 금속활자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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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 하면 나오는 ‘남명증도가’ 금속활자본 논란
  • 홍강희 기자
  • 승인 2022.12.15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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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박상국 교수와 유우식 경북대 객원연구원 최근 금속활자본 주장
많은 서지학자들 “말도 안된다. 삼성본과 같은 목판본이다” 반론 제기

 

'남명증도가' 공인본
'남명증도가' 공인본

 

‘남명증도가’와 금속활자본
논란의 이쪽과 저쪽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이다. 직지는 실물이 전해져 내려오고, 책의 맨 뒷장 간기에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글이 명확히 적혀 있다. 때문에 직지가 금속활자본이라는 것과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하 남명증도가)와 ‘상정예문’이 직지보다 앞선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직지를 언급할 때는 반드시 '현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명시해야 한다.

1200년대 전후 고려 무신정권에서 권력을 잡았던 최충헌은 후에 아들인 최이에게 권력을 넘겼다.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는 정확히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최충헌이 무인정권 안정기 때 문치시대를 열면서 금속활자 인쇄를 시작한 게 아닐까 학자들은 추정한다. 당시 고려 고종 26년 1239년에 목판으로 인쇄한 것으로 알려진 ‘남명증도가’는 전해 내려오고 금속활자본은 찾을 수 없었다. 최이는 책 맨 끝에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다시 판각한 책을 전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고려가 최소 1239년 전에 금속활자본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1234년과 1241년 사이에 ‘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해 각 관서에 나누어 보관토록 했다는 기록을 전했다. 이 책은 고려 인종 때 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해 50권으로 엮은 예서다. 하지만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와 ‘상정예문’은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몇 년전부터 목판으로 알려진 ‘남명증도가’ 중 한 권이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몇 몇 언론은 금속활자본이라고 못 박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남명증도가’가 될 것이다. 남명증도가는 1239년, 직지는 1377년 간행된 것이니 남명증도가가 138년 빠르다. 이는 세계인쇄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뉴스지만 공인된 건 아니다.

현존하는 ‘남명증도가’는 총 6종으로 알려졌다. 그 중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성본, 경남 양산시의 공인박물관이 소장한 공인본, 대구 스님의 소장본, 개인 소장본 등 4개는 동일본이라고 한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청은 삼성본을 지난 1984년 보물 제758-1호로 지정했다. 문화재위원회는 “1239년 최이가 이미 간행한 금속활자본을 견본으로 삼아 다시 새긴 것 중 하나가 전해진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라고 결론냈다. 문화재위원회는 심의 결과 공인본도 목판본이라고 밝혔다. 이에 문화재청은 지난 2012년 삼성본에 이어 보물 제758-2호로 지정했다.
 

박상국 교수의 주장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것이 금속활자본이라고 주장한다. 공인본의 소장자 원진스님은 이 책이 금속활자본인데 목판본으로 잘못 감정됐다며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에게 다시 감정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박 교수가 연구한 끝에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 그는 지난 2020년 1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의 탄생’이라는 책을 펴냈다. 박 교수는 여기서 금속활자본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던차 유우식 경북대 인문학술원 객원연구원도 지난 11월 공인본을 분석한 결과 금속활자본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반도체 생산 및 측정장비 개발회사인 ‘웨이퍼마스터즈’ 대표인 그는 자체 개발한 이미지 분석 소프트웨어 ‘픽맨(PicMan)’을 활용해 분석했다고 한다. 그 결과 1239년에 인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 박사는 이에 관한 논문을 헤리티지(Heritage)와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의 학술지 ‘보존과학회지’에 실었다.

박 교수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 탄생’이라는 저서에서 “삼성본과 같은 목판본은 먼저 판형을 평평히 다듬고 난 뒤에 글자를 새기기 때문에 모든 글자가 균등하게 인쇄돼 있다. 반면 공인본은 주조 과정에서 생긴 쇠 부스러기 같은 너덜이가 나타나기도 하고, 글자 획의 굵기와 높낮이가 달라 농담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활자의 획이 내려앉아 어떤 획은 인쇄되지 않았다. 활자표면은 평평하게 잘 주조된 것이라 해도 심어놓은 직육면체 활자들이 조금씩 위아래, 또는 좌우로 기울어져 상하좌우에 농담 차가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활자가 거꾸로 식자된 경우도 있다. 초창기 금속활자본에만 있는 현상들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최이의 지문에 나오는 ‘중조주자본(重彫鑄字本)’을 이정섭 선생에게 물어본 결과 ‘주자본으로 다시 주조하여’라는 답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제 최이의 지문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문화재위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지학자들은 이를 ‘주자본을 목판본으로 다시 새겨’라고 해석해왔다. 故 천혜봉 성균관대 교수도 같은 주장을 했다.

 

 

'남명증도가' 대구본
'남명증도가' 대구본

 

'남명증도가' 삼성본
'남명증도가' 삼성본

 

 

공인본이 목판본인 이유

그러나 많은 서지학자와 관련자들은 공인본이 목판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은 “공인본 소유자인 원진스님과 박상국 교수로부터 금속활자본 얘기를 몇 년전부터 들었다. 그러나 서지학계는 인쇄상태를 검토한 결과 삼성본-대구본-공인본 순으로 오래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문화재위원회는 삼성본과 공인본을 같은 목판본으로 보고 보물로 지정했다. 이어 서울 다보성고미술관이 2010년 남명증도가를 찍은 증도가字라며 활자를 공개해 한바탕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결국 2017년에 진품이 아니라고 판명이 났다. 이 때 문화재위원회가 다시 남명증도가를 면밀히 검토했는데 목판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황 총장은 삼성본과 공인본, 대구본의 특징을 분석한 결과 세 개의 본이 모두 같은 목판본이라고 주장했다. 이유는 ▲최이의 ‘중조주자본’ 해석의 오류 ▲테두리에 떨어진 흠결이 모두 같은 점 ▲판심에 목판을 새긴 각수의 이름이 있는 점 ▲글자의 목리(木理)나 칼자국이 모두 동일. 너덜이, 획의 탈락, 보사, 활자의 움직임, 활자의 높낮이에 의한 농담 차이는 동일판을 인쇄하면서 나타나는 차이점이지 금속활자본의 특징이 아님 ▲모두 경계를 나타내는 선이 없는 점 ▲개인 소장본에는 인수대비가 선왕인 세조·예종, 죽은 남편 덕종,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발원한 것을 1472년 6월에 김수온이 발원문을 작성해 수록했다. 이 발원문에 남명증도가 200부, 묘법연화경 2805부의 불경을 발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목판의 연도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준이 됨 ▲테두리와 판심·인출된 글자 획의 상태 및 가필의 흔적 등을 비교한 결과 위치가 모두 유사. 동일 목판으로 인쇄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들었다. 여기서 ‘보사’는 잘 안보여 덧칠한 것, ‘목리’는 나무 표면에 나이테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무늬를 말한다.

김성수 청주대 문헌정보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2020년 11월 문화재청과 한국서지학회가 이에 관한 학술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날 대부분의 서지학자들은 금속활자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며 “이건 사기극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다”고 잘라 말했다.

한편 문화재청 관계자는 “현재 서지학자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으로 안다. 학계의 의견이 중요하다. 박상국 교수가 금속활자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된 것”이라며 “타당한 사유가 있을 때는 문화재위원회에서 재심의 하지만 현재까지는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남명증도가’는 어떤 책인가

‘증도가(證道歌)’는 당나라 승려 현각이 깨달은 바를 시의 형식으로 저술한 책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이하 남명증도가)’는 증도가의 각 구절 끝에 송나라의 남명선사 법천이 7자3구씩 총 320편을 읊어 붙인 것이다.

또 “권말에 수록된 최이(崔怡, ?~1249)의 지문(識文)에 ‘남명증도가는 선가에서 매우 중요한 서적이다. 그러므로 후학 가운데 참선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책을 통해서 입문하고 높은 경지에 이른다. 그런데도 이 책이 전래가 끊겨서 유통되지 않고 있으니 옳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각공(刻工)을 모집하여 주자본(鑄字本)을 바탕으로 다시 판각하여 길이 전하게 한다. 때는 기해년(1239) 9월 상순이다. 중서령 진양공 최이는 삼가 적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각공은 글자를 새기는 사람, 주자본은 금속활자로 찍은 책을 말한다.

문화재청은 “이를 통해서 이 판본의 제작 동기와 1239년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최이에 의하여 주자본을 번각(飜刻)하여 간행한 목판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판본의 판각시기인 1239년보다 앞선 시기에 ‘남명증도가’가 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번각은 한 번 새긴 책판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새긴다는 의미다. ‘남명증도가’의 금속활자본이 전래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지문(識文)에서나마 우리나라 초기 금속활자인쇄술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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