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리즈-왜 ‘문화산수 구곡(九曲)특별군’ 괴산군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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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시리즈-왜 ‘문화산수 구곡(九曲)특별군’ 괴산군인가(1)
  • 김영이 기자
  • 승인 2023.02.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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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은 한국 구곡의 본산, 관광 자원화 절실
문사철시서화(文史哲詩書畵) 유교문화 감상할 수 있는 최상의 인문학 관광자원
이상주 박사 “구곡을 살리면 괴산 문화·경제가 살고 충북이 살고 한국이 산다”

 

충북도의 핵심전략이 레이크파크 르네상스라면 괴산엔 문화산수 구곡(文化山水 九曲)이 있다.

, 위대하다. 그러나 문화는 돈보다 더 위대하다. , 문화가 경제인 것이다. 21세기는 문화전쟁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문화자원 선점 경쟁시대에 살고 있다.

이에 충청리뷰는 괴산을 문화산수 구곡 특별군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3회에 걸쳐 매주 싣는다.

 

달천강 유역에 구곡 9

 

신개념 문화관광자원인 구곡을 국내 문화관광 대박 1호로 육성해 문화산수 구곡 특별군 괴산군을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괴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구곡을 자랑하고 있다. 고산구곡, 갈은구곡, 연하구곡, 쌍곡구곡, 선유구곡, 화양구곡 등이 유명하다. 화양구곡은 한국의 구곡을 대량 설정하게 하는 구곡의 모태이다.

 

구곡 전문가 이상주 박사
구곡 전문가 이상주 박사

 

현재 청주시에 옥화구곡과 서계구곡, 보은군 내북면에 낙우당구곡이 정해져 있다.

괴산 고산구곡에서 보은 낙우당구곡까지는 100리 가까이 된다. 모두 달천강 유역이다. 1개 강 유역에 구곡이 9개 설정된 사례는 드물다. 계곡을 끼고 있어 산수가 수려하고 도로가 잘 뚫려 관광하기도 편하다.

이러한 괴산의 독특한 문화산수 구곡문화관광특구를 문화자원으로 활용해 괴산을 문화선진군, 장기적으론 경제선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청주시는 이미 2020년 문화산수 옥화구곡관광길 일부를 개장했다.

이상주(69·충북 1호 한문학박사, 구곡 전문가) 전 중원대 교수는 구곡문화관광특구를 괴산군은 물론 한국 나아가 세계 최고의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 구곡을 살리면 괴산 경제가 살고 충북이 살고 한국이 산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계곡과 구곡의 차이는 뭔가. 계곡(溪谷)은 물이 흐르는 자연의 골짜기를 말한다. 구곡(九曲)은 계곡 하류부터 상류까지 아름다운 곳 아홉 군데를 정해 각각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한국 최고의 구곡인 화양구곡을 예로 들면 제1곡 경천벽, 2곡 운영담, 3곡 읍궁암, 4곡 금사담, 5곡 첨성대, 6곡 능운대, 7곡 와룡암, 8곡 학소대, 9곡 파곶이 있다. 9개 구곡의 명칭에는 거의 유학의 내용이나 특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이 박사는 설명했다.

최초로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가를 지은 사람은 중국 송나라의 주자(朱子·1130~1200). 그는 주역 구오(九五)의 원리를 이용해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설정했고 무이도가(武夷棹歌)를 지었다.

 

구곡 설정자는 율곡 이이

 

기호(畿湖·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와 황해도 남부 및 충남 북부를 포함한 지역) 사람으로는 율곡 이이(李珥·1536~1584)가 최초로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가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이 박사는 문화산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구곡은 계곡이라는 자연산수에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지게 한다는 유교경전 주역 구오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구곡은 문사철시서화(文史哲詩書畵), 즉 문학 역사 철학 시 글씨 그림 등 다양한 유교문화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유교문화 관광자원이자 최상의 인문학 관광자원이다.”

그래서 구곡문화관광특구의 유교문화관광자원의 가치로 역사문화, 자연건강, 생태체험 등 3요소를 들었다.

기호지방에 구곡문화가 융창하게 된 동인은 구곡이 학론통일의 상징이어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율곡 이이(1536~1584)의 도통을 계승하고 그 도통 계승의 표상화로 고산구곡가를 한역했으며 고산구곡도를 그리게 했다. 이렇듯 율곡의 도통을 계승한 우암은 당시 기호사람의 영수로 도통계승 의식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우암 송시열은 화양동에 거처하며 강학을 했으며 그 후 그 제자 권상하와 민진원이 화양구곡을 완성했다.

거기에 중국 만력황제와 승정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를 건립하고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는 화양서원을 지었다. 이후 중국을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화양이의식(尊華攘夷意識)을 흠모 계승한 사람들은 물론 기타 지역의 일부 사람들도 화양구곡에 와서 만동묘와 화양서원에 참배하며 존화양이의식을 견고히 했다고 한다. 송시열이 기호사람들에 끼친 영향이 심대함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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