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은 먹잇감 “이렇게 지극한 이익 없을 것”
상태바
충북은 먹잇감 “이렇게 지극한 이익 없을 것”
  • 박소영 기자
  • 승인 2023.05.04 09: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28년 안자이카도 일본인 기자가 쓴 ‘충북의 문화와 사람’
충북 곳곳 돌며 역사, 문화, 경제 기록…충북학연구소에서 편역
조선을 ‘기회의 땅’ 인식, 일본인 2남, 3남에게 투자 적극 권유
당시 충북의 모습 기록한 사진 자료 다수 수록, 설명까지 달아

흔들리는 한일관계
1928년 충북은?

 

1928년 일본인 기자 안자이카도가 발간한 <충북의 문화와 사람>이 최근 세상에 다시 나왔다. 충북학연구소의 정삼철최병철정민 연구원이 편역했다. 저자인 인자이카도 기자는 당시 호남일보 기자로 6년 정도 충남에 머물렀다가 충북으로 건너와 지사장을 역임하면서 일본인의 시각으로 충북의 시대상을 기록한다.

“19273월 회사의 명을 받들어 충북의 땅에 들어왔다. 충북의 땅은 13도 중 경계가 가장 좁고, 사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안선이 없는 땅이었다. 구체적인 도세의 추이를 관찰하고 문화 신장의 흔적을 반년 정도 검토했다. 이후 도내를 한 바퀴 돌면서 직접 지방 개발의 상황과 민정을 기록했다.” 저자의 말이다.

당시 충북은 면적이 489방리(方里), 인구는 70여만명을 포용하고 반도의 중축을 이루며 민정은 돈후하고 순박하다고 표현돼 있다. 또 산업, 교육, 교통이 타도에 비해 뒤질 것이 없고 산과 물의 자연미와 더불어 오풍십우(五楓十雨)의 천혜를 누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옛날부터 충북에 관한 공적서적 간행물은 필시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문화 흥륭의 근간을 이루는 인문사에 이르는 것은 아직까지 그 저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이번 책을 쓰게 됐다고 밝힌다. 이어 최신식 9포인트 활자를 채용해 1446, 모두 300페이지가 넘지 않도록 조절했다고 밝힌다.

 

 

1년 동안 기록한 충북의 모든 것

 

안자이카도 기자가 19273월부터 약 1년 동안 충북의 행정과 산업, 교육, 문화 등을 다룬 <충북의 문화와 사람>1910년 한일 강제 합병 후 18년이 지나 쓰였다. 전체 12장으로 1장부터 5장까지는 당시 충청북도의 역사, 인구, 토지, 행정, 금융, 교육, 종교, 교통, 농업 등을 기록했고, 6장부터 7장까지는 청주, 충주, 제천, 괴산, 단양, 속리산을 다니며 쓴 기행문 형식의 글이다. 8장부터 10장까지는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와 투자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고, 11장에는 당시 충청북도 관공서의 주요 인물을 소개하고 12장에서는 충청북도 공직자 요람을 수록했다.

이번에 충북학연구소는 1~10장까지 번역해 편집했다. 특히 8장과 9장에서 조선 투자의 절호기회, 모국의 부호 여러분의 일고를 바람이나 모국의 2, 3남 청년 제군은 모름지기 조선에서 활로를 찾아라등 당시 일본인들에게 조선을 기회의 땅이자 약탈의 대상이라고 선전하며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장남에게는 모국인 일본에 남아야 하지만 2, 3남은 도전정신을 가지고 조선으로 와 각종 이권 사업을 하면 돈을 크게 벌 수 있다는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한다. 이것이 모국(일본)에 애국하는 길이라고 저자는 강한 어조로 독려한다.

 

1928년 충북에 관한 사진 자료들. 

 

승려, ‘기생충으로 비유

 

저자는 나는 신문기자의 신분으로 전 조선은 물론이고 남만주와 북만주 및 시베리아까지도 상세하게 시찰하였는데, 만주는 아직 모든 면에서 위험하다. 그러나 조선은 이제 대일본제국이고 현재는 모든 면에서 일본에 손색이 없다. 다만 조선의 산업계는 일본에 비해 미성숙한 상태에 놓여있다대황무지 개간간척 등 큰 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조선 각지 도처에 남아있다. 투자의 각오가 있다면 앞으로 3~5백 정보, ~2천 정보의 큰 논을 얻을 수 있다. 사업수행 뒤에는 반드시 소정의 사업보조비를 부여해줄 뿐만 아니라 동양척식주식회사나 토지개량회사는 약간의 수수료로 그 사업 전부를 대행해준다. 식산은행이나 동척금융부는 사업비를 융통하는 편법을 알려주는 등 세상에 이렇게 지극히 편리, 지극한 이익이 따로 없을 것이다라고 밝힌다.

안자이카도는 한일합방 후 20년의 긴 세월이 지나도(1928년 현재) 도내 일본인 거주자가 50만인에 미치지 못하고, 투자 또한 매우 적어 하늘이 준 자원을 놓치고 있다고 애석해한다. 그러면서 원인으로 조선의 실정이 일본인에게 잘못 알려져 있음 먼저 정착한 일본인을 이해하지 못함 조선인을 쓸데없이 어렵게 여기는 점 등을 꼽는다.

임기현 충북학연구소장은 이 글은 일본의 시선에서 현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는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의 태도, 그 오랜 기원을 읽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저자는 때때로 충북에 대해 악평한다. “보은 속리산의 대법주사를 시작으로 도내 35개 사원이 있고 176인의 승려가 있는데 저들은 그 이름만 불교, 사원, 승려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거의 종교로서 인정할 추오의 가치가 없다. 도당국이 제시한 통계에 의하면 1870명의 신도가 있는 것처럼 말하나 이들은 실제 신도가 아니고 각 사원에 딸린 사전(寺田), 사림(寺林)에 의지하여 생활하며 그 남은 음식을 핥아먹고 생활의 바탕이 없는 일종의 기생충이다.”

정삼철 충북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생충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약과다. 당시 일본인 저자들이 쓴 책을 보면 의병이나 동학당을 도적이나 악당, 모리베로 표현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뭘까. 우선 기자라는 신분으로 다양한 정보를 기록해놓은 책이다. 사진 자료까지 꼼꼼히 기록해 당시 시대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 이 책을 읽는 현재 우리시대의 기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건데 우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충북의 문화와 사람>책에는 수많은 사진 자료들이 실려있다. 또 기자로서 쓴 글은 100여년전 이야기지만 현재와 다를 바 없는 부분도 눈에 띈다. 1926년 세계 경제가 모라토리엄선언이후 불경기가 계속돼 은행업자와 일반금융업자가 긴축정책을 실시해 대출이 잘 되지 않는다고 기록한다. 1928년 물가가 올라 경기가 위축돼 있는 데다, 침체로 인해 농민들의 쌀 가격이 점점 떨어져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저자는 불경기는 세계대전의 뒤를 이은 여파로서 전세계가 동일한 것으로 본도 상계 사업계만 뒤처지는 게 아니라고 설명한다.

또 제천에 정착한 한 일본인을 저자가 소개받은 일화를 소개한다. 지방 토호세력이 된 일본인은 기자가 명함을 건네자 나는 광고를 하지 않는다며 시비조로 덤볐다고 한다. 저자는 당황하며 신문기자 쪽에서는 영업상 조급하게 상담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며 우리를 악덕기자로 보았느냐로 따져물었다는 것. 기자는 화가 나 그 일본인을 욕심많은 늙은이라고 폄하한다.

또 충북의 광천수를 소개하면서 청주군 북일면 초정리에 있는 광천수는 용출량이 하루 6백석이라고 말하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 나온 세종대왕 일화를 소개한다. 현재 경성 나카하라테츠코 씨가 개인경영으로 천연사이다 및 크리스털 2종을 청량음료수로 가공생산하여 1년에 약 3만 상자를 일본 및 경성 기타에 판매하고 있다. 또 충북도에서는 지방비 100원을 판로확장비로 보조해줬다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