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훈민정음》 해례본의 암호 같은 문장부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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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훈민정음》 해례본의 암호 같은 문장부호들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 승인 2024.04.04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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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새긴 '작은 동그라미' 부호

문장부호는 예나 지금이나 문자 소통을 도와주거나 보완해주는 책의 필수 구성요소이다. 옛날 책은 지금과 다른 부호가 있어 이를 모르면 아예 의미 파악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해례본에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문장부호가 쓰이지는 않았지만, 마침표, 쉼표에 해당하는 기본 부호뿐 아니라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사성을 나타내는 작은 동그라미가 쓰였다. 이를 순우리말로는 ‘돌림’, 한자어로는 ‘권점(圈點)’ 또는 ‘권발(圈發)’이라 부른다.

오늘날의 마침표에 해당하는 ‘구점(句點)’은 오른쪽 아래 글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찍었다. 오른쪽 아래 찍는다고 하여 ‘우권점(右圈點)’이라 부른다. 오늘날 쉼표에 해당하는 ‘두점’은 글자 가운데, 글자 조금 아래 찍어 ‘중권점(中圈點)’이라 부른다.

문장부호 종합도(원래 색은 흑백).
[표1-1] 《훈민정음》해례본 간송본 사성 모음(낙장 보사 부분 정음 앞 두 장 제외)

평성은 가장 낮은 소리이고 거성은 가장 높은 소리, 상성은 낮았다가 높아지는 소리다. 입성은 빨리 끝내는 소리다. 이렇게 소리의 높낮이, 곧 성조를 나타내는 평성, 상성, 거성, 입성 사성을 나타내는 부호는 한자와 한글이 달랐다. 앞의 <그림>처럼 한자는 한자 네 귀퉁이에 작은 동그라미를 권점을 찍고 한글은 글자 왼쪽에 둥근 점을 찍었다.

구두점사용예(정음해례8ㄴ)

찍는 방식은 한자의 경우 글자와 살짝 겹쳐 찍는다. 오른쪽 위에 찍는 점을 거성, 왼쪽 위는 상성, 오른쪽 아래는 입성, 왼쪽 아래는 평성이라 한다. 사성 부호를 정확히 찍은 문헌은 중국이나 조선이나 드물어서 보편적 기호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중국의 ≪성리대전≫과 더불어 사성점을 가장 정확히 찍은 대표적인 문헌이다. 찍은 방식은 중국과 조선이 달랐다. 중국은 주로 특정 도구를 활용해 찍었고 해례본은 나무에 직접 새겼다.(섭보매, 2016, ≪훈민정음≫ 해례본의 권점(圈點) 체계에 대하여, ≪인문학연구≫ 17집 1호. 참조)

 

평성사용예(정음해례14ㄴ)<br>
평성사용예(정음해례14ㄴ)

해례본의 모든 한자에 사성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뜻이나 음의 변화를 주는 경우에만 찍었다. 이를테면 ‘復’은 보통 ‘돌아올 복’이지만 〈그림〉의 파란색 테두리 안의 한자처럼 거성 표시를 하면 ‘다시 부’로 읽어야 한다. 즉 終成復° 用初聲은 ‘종성부용초성’이라고 읽는다. ‘끝소리는 첫소리를 다시 쓴다.’라는 뜻이다. ‘易’은 보통 ‘바꿀 역’으로 쓰이지만, 거성 표시 ‘易°’를 하면 ‘쉬울 이’로 뜻과 음이 모두 다르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에서 후에 보사된 앞 두 장을 제외하고는 한자 갈래로는 30자이고 반복된 글자까지 합치면 60회 쓰였다. 30자가 쓰인 구절이나 문장 보기와 번역은 [표 1]과 같다.

 

상성 사용 예(정음해례10ㄴ)

우리말, 한글에 쓰인 사성 부호는 한자와 달랐다. 왼쪽에 검은 둥근 점을 나타내 표시했는데 점이 없으면 평성, 하나면 거성, 둘이면 상성, 입성은 평성, 상성, 거성을 겸할 수 있다. 곧 평성, 상성, 거성은 울림소리(ㄴ,ㄹ,ㅁ,ㅇ)로 끝나야 하는데 입성은 반드시 안울림소리로 끝나야 한다. 평성이면서 안울림소리 종성(받침)이면 평성적 입성, 거성이면서 종성이 안울림소리이면 거성적 입성, 상성이면서 종성이 안울림소리이면 상성적 입성이 된다.

일부에서는 15세기에 우리말에 실제 사성이 있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질문은 해례본을 제대로 읽지 않고 하는 질문이다. 해례본에는 한글 표기 글자는 모두 사성 표시가 되어 있다. [표]와 같이 매우 짜임새 있게 구별되어 있다. 없는 것을 이렇게 짜임새 있게 할 수는 없다. 당연히 있으니까 해 놓은 것이다.

한글의 사성 부호

다만 우리말의 사성은 중국 사성과 질적으로 다르다. 중국어에서의 사성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이지만 우리말에서는 필수 요소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엄격히 지키지 않았고 변별 요인이 없어지다 보니 안 쓰이게 된 것이다. 다만 그 흔적이 영남 방언 등에 남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라졌다기보다 상성은 긴소리로 평성, 거성, 입성은 짧은소리로 바뀌었다.

해례본 간송본 사성 모음(1)
해례본 간송본 사성 모음(2)

이렇게 보면 해례본은 문장 부호 갈래로 보면, 빈 동그라미 점(권점) 6개와 검은 동그라미 점 2개 모두 8개가 쓰였고, 이런 부호가 매우 충실하게 찍힌 대표적인 문헌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성 들여 만들었다는 의미다. 내용을 저술한 세종과 여덟 명의 사대부들, 누군지는 모르지만, 글씨를 쓴 사람, 나무에 새긴 각수장이 등 많은 사람들이 새 문자를 제대로 정확히 알리기 위해 해례본 저술과 제작에 온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사성 짜임새

이런 정성과 기호의 규칙적 쓰임새를 알고 해례본을 읽는다면 내용과 의미가 더 흥미롭고 감동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저 작은 동그라미를 나무에 새기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나무 다듬는 끌을 조심스러우면서도 민첩하게 움직였을 장인의 손길을 생각해보라. 새 문자의 기적, 새 문자의 새벽은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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