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포럼, 확실한 대안세력 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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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포럼, 확실한 대안세력 될 것 “
  • 홍강희 기자
  • 승인 2003.05.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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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바쁜 강태재 문화사랑모임대표(57·청주상공회의소 지역경제연구소장)는 최근 또 한가지 일을 벌였다. 직지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직지포럼’ 발족을 추진하는 것이다. 오는 29일 창립대회를 하기로 못을 박고 사이 사이 만나서 회의를 해야 하는 만큼 무척 바쁜 그는 "일단 20 ∼30명 선에서 포럼 형식으로 시작하되, 나중에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역할이 증대되면 별개의 조직으로 갈 것" 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1일자로 사업2부장에서 지역경제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이제 2선으로 물러났다. 그래서 금년에는 내년에 있을 정년퇴임 준비나 슬슬하면서 소설집을 하나 낼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된 게 일이 더 많다”고 인사를 건넸다. 몇 가지의 일을 척척 해내던 젊은 시절보다는 여유가 있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대표나 중요한 직책을 맡겨 이래저래 발을 뺄 수 없는 그는 정말 한가하게 퇴임준비 할 때가 아니었다. 경제문제를 비롯해 문화·사회 등의 지역현안에 깊숙히 관여해온 그의 역할이 아직은 필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먼저 ‘직지포럼’의 성격과 역할 등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 그동안 직지에 대해서는 청주시민 누구나 이야기했지만, 직지에 관한 정통 모임이나 단체가 없어 아쉬웠던게 사실이다.
“전에 재단법인 ‘직지와 문화’를 만들려고 했으나 좌절됐다. 처음에 틀을 너무 크게 잡고 욕심을 부리다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소박하게 시작하려고 한다. 모임 사람들이 직지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직지에 관한 일에 대안제시, 평가, 비판 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장 보더라도 청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직지의 세계화’, 민간주도로 움직이는 ‘흥덕사복원’ 등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앞으로는 아마 더 다양할 것이다.”
실제 ‘직지포럼’이 제대로 가동되면 특정한 사람이 직지를 ‘사유화’ 하거나 흥덕사복원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재 적잖은 사람들이 일부 사람들에 의해 직지와 흥덕사의 본질이 ‘훼손’될까봐 걱정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가 직지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청주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역시 직지밖에 없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등하는 것은 직지밖에 더 있는가. 이를 잘 살려서 상품화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문화사랑모임에서는 앞으로 청주시 경관을 아름답게 바꾸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은 먹고 살기 바빠 도시경관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제 지붕색, 건물색, 간판 등이 아름다워지도록 관심을 기울일 예정이다. 이런 것들이 바뀌면 청주시는 엄청난 경쟁력을 가진 도시가 될 것이고, 전국아니라 전 세계에서 보러 올 것이다.”
이 이야기 끝에 그는 “문화사랑모임의 외연을 넓혀 시민운동 차원으로 확대할 것이다. 다른 분야는 매우 다양하게 특화돼 있는데 문화는 그런 것 같지가 않다”며 “상공회의소에서 정년퇴직하고 내가 할 일은 문화·시민운동”이라고 말했다.
-강소장은 문화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현안에 쓴소리·단소리를 아끼지 않았는데 지금 관여하고 있는 일은 어떤 것들인가.
“지역개발 문제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각종 토론회·공청회에 참석하게 됐고 이 때부터 라디오·TV 진행자로 활동해 왔다. ‘일이 잘 못 꼬여’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보니 90년대 말부터 지역사회 현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은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상임위원, 충북아트페어 조직위원, 직지의 날 집행위원장, 직지포럼 추진위원, 청주시민신문 편집위원 등이 내가 가진 직책이다.”
과거에도 그는 단재동상건립추진위 공동위원장, 홍범식·홍명희 생가보전을 위한 모임 공동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문화사랑모임 대표를 맡은 것은 지난 2001년. 이 많은 일을 어떻게 진행하고 신경쓸까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 그로부터 “그러니까 엉터리지…”라는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하지만 강소장이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청주상공회의소에는 언제 입사했고 문학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무엇인가.
“지난 79년 8월 상공회의소에 입사해 올해로 26년이 됐다.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아 글쓰기에 취미를 붙였다. 상공회의소에 올 때 홍보업무를 맡았고 후에 조직개편이 돼서 초대 홍보실장을 지냈다. 이 때 매월 46면짜리 월간지 ‘청주상의월보’를 발행했는데, 기관지로는 처음으로 시·소설·콩트를 다뤘다. 그러면서 지역 문인들과 자연스레 교류를 하고 후에 ‘내륙문학’ 동인을 거쳐 주간까지 지냈다.”
글쓰기에 감각이 있었던 그는 홍보업무를 할 때 보도자료식 홍보자료를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는 팩스도 귀할 때라 원고지에 써 기자들에게 돌렸다는 것. 지난 95년 ‘시와 시론’을 통해 등단한 강소장은 이듬해 단편소설 ‘봄눈’으로 ‘시와 시론’ 문학상을 수상했다. ‘백제의 미소‘ ‘무릎에서 가슴까지’ ‘코리안드림’ 등 작품 다수가 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강소장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 김희식 문화사랑모임 사무국장이었는데, 그는 강소장이 앞으로 큰 역할들을 해낼 것이라 말했다. 본인은 스스로를 리더십이 없는 사람이라고 진단했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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