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만년교의 유다리 선비들이 다니는 다리,
세월에 묻혀 비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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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만년교의 유다리 선비들이 다니는 다리,
세월에 묻혀 비석만…
  • 충청리뷰
  • 승인 2003.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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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건설박물관 손광섭 관장의 세상의 통로를 찾아서

밀양 아리랑 가락이 여기에서
만년교(萬年橋)는 대구.마산 중간에 있는 중요한 교통 통로로서 남천(南川)에 가설되어 있어 남천석교라 부르기도 하며, 길이 13.5m, 폭 3m, 높이 5m, 너비 11m의 반원형으로 된 석홍교(石虹橋)이다.

또, 만년교에서 동쪽으로 600m지점에 석교가 하나 더 있다. 영산읍성 동쪽 하천의 출입을 할수 있는 석교로써, 성밑을 흐르는 냇물을 건너가는 통로로 사용하였으며, 영산면 교리와 성내리 사이를 흐르는 하천 중간지점에 만년교처럼 화강암으로 축조한 조그마한 무지개형 다리인데 이 다리를 “유(儒)다리” 또는 ‘이우다리’, ‘놋다리’라고도 부른다. 축조시기는 기술적인면으로 볼 때 영산 석빙고를 축조한 삼국시대(가야?)라고 추측하나 정확히 알수는 없으며, 만년교보다는 훨씬 앞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길이는 2.9m, 폭2.8m, 높이 2m이다. 또한 유(儒)다리는 구계리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교리와 구계리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이 다리이름은 교리와 성내리 사이로 흐르는 북쪽향교옆 계곡의 물이 영산앞 시내로 합류하며 이 계곡 서쪽의 항교로 통하는 길이며 유인(儒人)들이 다니는 길이므로 유다리 유(儒)자가 붙었다 한다.

유다리라는 명칭은 고어(古語)의 하나이며 어느곳에서도 들어볼수 없는 드문 말이다. 이말은 고대 궁중에서 씌어온 것인 듯 하다. 음력 정월 보름날 달 밝은 밤에 다리밟기 놀이가 성행했는데, 지금도 정월 보름 달밤에 이름있는 큰 다리를 자기의 나이만큼 밟으면 다리가 건강하고 다릿병이 나지 않는다는 하나의 풍속에서 나이많은 노인네들은 열심히 다리밟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옛날 궁중의 공주는 밖에 나가서 일반민과 같이 다리 밟기 하기가 마땅치 않았던지 궁중에서 다리밟기를 했다고 한다. 궁중의 궁녀들을 줄을 지어 허리를 굽혀 앞사람과 어깨를 짜서 이어 세우고 둥근 다리 모양으로 꾸며서 공주를 그 등위에 올라서게 하고 공주의 양쪽에 궁녀가 각각 공주의 양손을 잡고 궁녀들의 등을 밟으며 다리밟기 놀이를 했다. 이렇게 궁녀들이 늘어서서 어깨와 등으로 둥글게 만든 다리를 놋다리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기 전에는 유다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놋다리 혹은 유다리라고 하는 이름이 궁녀에서만 불렀던 다리이름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산 유다리에서는 공주가 다리밟기 놀이를 했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아무튼 유다리는 둥근 다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궁중에서 쓰인 말이다.

현재 유다리는 1997년 하천 복개공사때 콘크리트로 덮어 옛 형태를 알아볼수는 없으며, 다만 ‘유다리’라는 조그만 비석 하나만 서 있을 뿐이다.
  이곳 영산에는 옛날 만년교 다리밑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의 빨래방망이 소리와 영산읍내 물레방아소리와 아낙네들의 웃음소리가 어울려 아름다운 밀양 아리랑 가락과 같다고 전한다. 영산 주민들의 입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밀양아리랑을 조금 소개하자면,
     영산읍내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요.
     우리집 저 문등이는
     나를 안고 돈다.
  만년교란 뜻은 다리가 튼튼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유래가 있기 때문이다. 이다리 하류에는 연지라는 인공호수가 있고 그 중앙에 항미정이란 정자가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만년교는 조선후기 남부지역의 토목공학적 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매년 3월초에 만년교에서는 주민들의 축제가 열린다.

<석교중건기(石橋重建記)비문> 해석
“교량과 도로를 잘다스림이 군자의 도리라”

상지(上之)29년 임진 4월에 내 친구 영산 신관조 보가 나에게 글로 물어 가로대, 읍치(邑治) 동쪽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국초(國初) 계유(癸酉)하고 그 무너진 것은 정축년 대수에 무너지고 대로 전하는 말이 지축이 허술해서 옛날에 연지못을 파고 이 다리를 세워 허술함을 막고 이 다리가 흥하고 폐하므로써 읍이 기름지고 야위어진다 하니 이것이 풍수 화복설에 가까우나 대개 일을 하는 도리는 다 뜻과 이치가 있어서 하는 것이니 깊은 데는 옷을 벗고 얕은 데는 겉고 건너는 형편이니 이를 생각치 않을 수 없어 민간에게 거두지 않고 아전끼리 의논해서 돈 수천냥을 마련했다. 다리를 복구할려고 도모하니 영산이 내 관하에 있으니 공이 날로 도와달라고 권유하기에 옛날에 정(鄭)나라에서 정치할 때 배로서 건너니 맹자왈 은혜는 베풀지마는 정사는 안된다. 제갈 무후가 말하되 세상을 다시리는 데는 큰 덕으로 해야지 작은 은혜같은 것으로는 안된다. 교량과 도로는 잘 다스림이 군자의 도리라. 공의 이 역사는 가히 정사를 잘 할 줄 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어찌 은혜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중이 말하기를 교량은 8폭의 4분지 1이라고 하니 대개 부처는 자비로써 하고 이를 민망히 여겨 마음을 쓰니 공은 영산백성에게는 산 부처일과 같은 즉 그러나 공과 같은 문학 재덕으로 조그만 읍에 와서 이렇게 욕을 보는 것이 가시속에서 봉이 사는 것 같고 큰 인물이 작은 일을 다하니 이제 한 교량에 대한 이야기야 말할 것 있나 족히 칭찬할 것 없다. 일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장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오직 우리는 백성을 크게 구하는데 있으니 내가 공에게 더 두텁게 바랄 수 없다. 다리 길이가 8간(間)이며 광(廣)은 그 4분의 1이다. 그 이름을 만년교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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