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아이작싱어 ‘인간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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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이작싱어 ‘인간 쓰레기’
  • 김상희 시민기자
  • 승인 2003.08.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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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싱어
1904년 폴란드 바르샤바출생
1978년 노벨문학상 수상
고레이의 악마, 루불린의 마술사 외

  미국 문학의 유명작가 중 다수가 유태인이듯 이 작품의 작자 또한 유태인이다. 이 작품은 그의 고향인 바르샤바에 이 작품의 주인공인 맥스가 그 첫 모습을 드러내면서 전개된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06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유태인 거주지가 주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의 전개를 통해 운명이란 굴레에 처한 나약한 인간이 그에 대한 저항이 과연 가능한가와 그와 관련된 도덕적 가치관에 대한 의문을 담아내고 있다.

어린시절을 바르샤바의 유태인 거주지에서 성장,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가 그곳에서 사업을 하여 부자가 되는 주인공 맥스.
그러나 그는 자식을 잃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내 곁을 떠나 세계 각지를 떠돌다 결국 자신의 험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바르샤바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많은 여인들을 유혹하고, 고난에 빠뜨리면서 그에 대한 갈등으로 고뇌하게 된다.
이것은 1978년 노벨문학상 수장자인 아이작 싱어의 대표작중 하나인 작품 <인간 쓰레기>의 줄거리 라인이다.
작가의 특징인 자연스런 얘기의 엮음은 이 작품에서도 그의 뛰어난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바르샤바라는 한정된 지구내에서의 사건의 전개가 자칫 독자들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할 수도 있으나, 작가의 그런 장점이 독자들에게 책 읽기의 재미를 유발함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맥스는 처음 바르샤바의 최고급 호텔에 투숙하여 랍비의 딸인 치렐과 약혼을 준비하며, 빵가게 주인의 아내, 그곳 유지의 아내, 어린 하녀 외의 많은 여자들을 마치 장난치듯 설렵하거나 유혹을 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로 갈등을 겪게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맥스 자신에게 일면 하나의 장난과 유희처럼 생각되듯 이 작품을 접한 독자 또한 너무나 많이 변화되는 에피소드를 대하면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맥스 자신으로 인해 많은 여자들이 고난에 처하게 되는것과 그로인한 맥스 자신의 심경의 변화가 너무나도 빈번하게 극과 극을 달리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어떤 하나의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그것을 반성하고, 깊이 자책까지 하지만 곧이어 같은 그런 행동의 유혹에 자연스레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이러한 사건 전개의 성향은 작가 자신의 삶으로부터의 사고방식, 고뇌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는 유태인 출신으로 어린시절부터 엄격한 율법주의에 익숙해 있었고 그런 헤브라이즘에 따른 심한 죄의식으로 인해 이 소설이 바르샤바의 유태지역에 거의 한정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징으로 주인공인 맥스가 많은 여인들을 접하면서도 일정한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즉 각각의 여인들과 한 번 쯤은 바르샤바를 이탈해서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자신의 아내인 로셸과 이혼을 하는 것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정부로라도 같이 살 것을 희망을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실천에는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예로 이 작품은 작가의 유태인의 엄격한 율법에 따른 모든 행동 양식과 사고 관습이 작품에서 매우 세부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많고 많은 지켜져야만 될 것과 그것에 대한 숭배, 존엄. 그로 인해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고뇌, 자신에 대한 비하. 이런 것들에 대한 실물적인 묘사가 매우 풍부하게 실려 있어 이 글을 읽다 보면 1906년 바르샤바의 유태인 집단 거주지에 와 있는 것과 같은 심상을 지니게 한다.

<그는 자기가 여기 속해 있다고 있다고 느끼면서 발코니로 나갔다. 거리의 구석구석에서는 안식일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빵집 사람들은 롤빵이 아닌 할라, 슈트리츨 그리고 케이크를 운반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젖은 수염과 귀밑머리를 드러내 놓은 채 얼굴이 빨갛게 되어 목욕 의식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가게의 반쪽 문들이 닫혀지고 있었다.>

<브리스톨 호텔까지는 멀어요. 당신이 물건을 가지고 다녀도 괜찮은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에이레프-안식일에 물건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지역을 표시하는 것 말입니다.-을 연결하는 줄이 흔히 잘 떨어져 나가니까요.>

이처럼 작가는 유태인 거주지의 배경과 그들 종교의 세세한 율법의 풍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주인공인 맥스가 랍비의 딸인 치렐과 약혼직전에 까지 이르나-약혼이 즉시 성립되지 않은 것은 랍비의 강한 종교 의식으로 그에게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수염이 어느정도 자라야 가능하다고 한 것- 또 다시 다른 여자와 애정행각을 하게 된다.

<그는 치렐과 그녀의 부모가 그의 탈주를 알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상상해 보았다. 치렐은 울다가 실신 할 것이고 창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할 것이다.‥‥랍비는 그에게 치명적인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이로 인해 맥스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랍비의 ‘저주’에 처해 질 것을 두려워하나 그것도 잠시 그는 또 다른 애정행각을 이어간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과 인물들의 감정은 영화의 필름과도 같이 매우 빠르게 이어지며 그 과정에 작가의 신랄한 익살과 회의가 담겨있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의 일련의 많은 사건들의 전개 과정을 통해 작가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려 했던 것은 인간의 허약함과 그로 인한 도덕의 타락을 드러내려고 하면서도 이에 대해 작가는 그에 대한 합리화내지 변론을 시도하고 있다.

즉 인간이 그러한 것은 인간이 지니는 운명이며, 이러한 운명에 처한 인간 존재를 비난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자신과 독자들에게 같은 질량의 무게로 그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자칫 개인의 타락을 운명의 굴레에 기인하는 것으로 떠넘기는 것인 듯 하지만, 그리스 비극의 원형이 운명의 굴레로부터 그 핵심을 이룬다는 점과 비교한다면 이 작가의 의문이 곧 자기변명으로만 일관된다 할 수 없을 것이며, 이에 더해 작가가 작품 속에서 사건의 전개를 통해 빠져드는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 운명의 절대적인 것의 간접 암시를 설득력 있게 엿보이고 있다. 

이것은 작가 스스로가 평생을 그 자신의 엄격한 종교의 굴레에서의 고뇌가 담긴 의문이기도 하지만 정작 지금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이 이 작품을 다소 무겁게 보이게 할 수 있으나 실제 작품의 지문은 매우 빠른 사건의 전개를 자연스러우며 흥미롭게 펼쳐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속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의 성격을 단순 명료하게 표현하나 오히려 그것이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에 감상의 재미를 두어도 좋을 작품 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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