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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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침묵
  • 충북인뉴스
  • 승인 2013.04.10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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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돈 문학테라피스트

엘리엇의 <황무지>는 식물신(植物神)들을 죽여 매장함으로써 재생이 불가능한 황폐한 땅을 상징한다.

재생이 불가능한 땅이기에 봄기운으로 라일락을 키워내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들어도 4월은 잔한 달인 것이다. 재생은 하였으나, 황무지에서의 삶이 연장되기 때문에 두렵고 잔인한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해마다 봄이 되면 길가의 나무들이 수난을 당한다. 목이 잘리고 팔이 잘린다. 봄의 부활이 두렵다. 차라리 망각의 눈에 쌓인 겨울이 따뜻했다.

발레리나의 발가락처럼 옹이진 모습으로 4월을 맞는 가로수를 보고 있노라면, 저곳이 바로 식물신을 매장한 황무지라는 생각이 든다. 잘리고 남은 가지에서 잎은 피워내겠지만, 그 황폐한 땅에서의 재생이므로 몸서리쳐지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꽃이 필 때 / 꽃이 질 때 / 사실은 참 아픈 거래”(이해인<꽃이 되는 건> 중에서) ─ 나무가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달아줄 때도 아픈 거라는데, 사람은 봄이 오기 전에 가지를 잘라버려, 나무가 스스로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달아줄 권리마저 모두 빼앗아 버린다. 사람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오직 사람의 욕망에 기준을 둔 폭력의 난무인 셈이다. 우주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를 상실한 물질문명 사회의 공허와 허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인 셈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도 잔인한 4월이 왔다. 어느 날인가 새벽부터 윙윙 소리가 난데없이 들렸다. 나무를 자르는 전기톱 소리였다. 커다란 나무는 모두 목과 팔이 잘려나갔다. 나무를 자르라고 명령한 사람은 나무가 상가 간판을 가린다든가, 인가의 유리창을 가리기 때문이라는 가당찮은 이유를 댔지만, 아무래도 가을에 낙엽을 쓰는 게 귀찮아서 나무를 자르도록 명령한 게 틀림없어 보인다.

1동 벽과 3동 벽 사이는 정말 한적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근심 없이 자라던 메타세콰이어가 잘려 나가자 까치 한 쌍이 날벼락을 맞았다. 갑자기 집을 잃고 번짓수까지 잃어버렸다. 사람이 사람의 집을 소중하게 여기듯 까치도 까치의 집이 소중할 터인데 집이 헐린다는 계고장 하나 없이 무지막지하게 철거해 버렸다. 톱날소리에 놀라 가슴을 조이다가 아파트 굴뚝에서 우두커니 앉아서 향수를 달래어 본다.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며 살던 까치. 사람과 같이 살면서 아침마다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던 까치는 <성북동 비둘기>처럼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아파트 단지의 하늘을 한 바퀴 돌고는 사람의 마을에서 떠나버리고 말았다. 까치가 떠나버린 아파트 단지에는 봄이 와도 침묵뿐이다.

지상에서 생명의 역사는 모든 생명체가 상호작용해온 역사이다. 지구가 생긴 이후 인간 이외의 다른 생물이 환경에 옳지 않은 변화를 준 경우는 없었다. 오직 인간이라는 한 종족이 무시무시한 문명의 힘으로 지구의 질서를 파괴시켰다. 새와 나무와 곤충과 강물이 서로 어울려 살던 지구에서 사람만 혼자 살겠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지구를 황무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악마적인 인간 사회를 향해 <황무지>의 저자는 천둥의 소릴 빌어 이렇게 외치며 시를 맺는다.

다타 - 주어라
다야드밤 - 공감하라
다먀타 - 자제하라

식물에게는 식물이 필요한 것을 주고, 식물과 함께 공감하고, 인간의 욕망을 자제하는 것, 그것은 곧 식물의 신을 살려내는 일이다. 그러면 황무지를 재생시켜 맨 처음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평화를 얻을 것이다.

인류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문명의 이름으로 치달려 온 길은 재생의 고통을 안겨준 길이었다. 그 길의 끝은 파멸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길은 재생의 기쁨을 안겨줄 길이다. 인적이 드물고 평탄치 못한 길이지만 꼭 가야할 길이다. 그 길은 지구촌의 보존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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