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비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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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비예술
  • 충북인뉴스
  • 승인 2013.05.2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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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충북민예총 부회장
 타자라는 말이 있다. 쉽게 다른 사람을 뜻하지만, 철학에서는 이를 근사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타자는 자아의 상대개념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이거나 특별한 관계 여부를 떠나서, 자아는 언제나 타자를 의식하고 고려하면서 살아간다.

타자를 한정시켜서 자기에 대한 타인으로 본다면 그런 경우는 자기와 타자의 인간관계가 문제시된다. 예를 들면 사르트르는 자타의 인간관계는 서로 타인을 부정하는 상극관계라고 하지만 부버나 마르셀은 자타의 인격적 관계와 비인격적 관계를 구별하여, 전자의 관계에서 타자는 ‘나’에 대한 2인칭인 ‘너’이며, 후자의 관계에서는 타자가 3인칭으로서의 ‘그’나 ‘그것’이며 거기서는 타자의 인격이 ‘나’에 의하여 대상화되고 물화된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리스도교에서의 신은 인간의 타자와는 다른 절대의 타자이지만 인간이 2인칭으로 부를 때는 자타의 인격적 관계와 같은 관계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관계하여 발생한 사건이 생기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자화 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더 큰 사건으로 희석화 되어 사라지거나 사건의 전말을 부정하여 오래 끌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는 끝없이 생산되는 타자와의 싸움으로 자기단련을 한다. 어쩌면 단련이 아닌 파괴, 회피일수도 있다. 자아는 또 다른 자아와의 불일치로 타자를 인정치 않는데서 불행의 불씨는 발생한다. 나의 인정은 타자로 인해 가능한 것인데 자신의 습성 상 불리한 부분은 인정을 하지 않고 자신의 행적을 지적하는 타자를 악마로 규정하고 타자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인해 자신의 타자에 대한 불신과 몰이해가 커져가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는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승부하여 타자의 의견을 인정하는 것이 자아의 형성에 타자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타자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자아를 부각하기위한 과장된 행위에서 비롯되는 불일치이다. 타자의 관심은 자아의 실존에 중요한 존재이므로 거대한 몸짓이나 형식과 내용에 맞지 않는 방법으로 자이를 표현하는 모습은 타자에 대한 동경보다는 외면이 커지는 것이다.

창작은 예술가에게 있어 고통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새로움을 추구해야하는 창의적 도구가 자아 안에서 불합리한 소통으로 연속되기 때문이다. 원래 예술은 주체적인 물을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이다. 그 물의 표현을 감상자가 향수하는 것은 단순히 관능적 쾌감에서 추창조하는 과정이다.

개성적인 가운데도 보편성이 나타난 예술작품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서이다. 자, 보편성을 일반적인 대상자에게 전달을 하는 예술가의 책임은 당연히 타자의 관심내응 읽어 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이라고 타자들은 이야기하고 있고 타자들의 상상 밖은 비예술로 평가한다. 반면 예술의 내부적 평가를 반하는 예술의 경우 반 예술로 규정을 하는 경우이다.

반 예술을 마르쿠제는 그림이 있지만 예술로서 의도되지 않은 예술이라 하고 배트코크는 기존 도덕을 위반하는 것으로, 조지 디키는 예술을 관습으로 보고 반 예술이란 관습의 규범을 이용하여 예술 장르 포함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술안에 예술적 삶을 지향하는 많은 향수자이 안고 가려하는 시대는 흐름으로 보아 비예술이 예술을 넘어서고 반 예술이 동시대의 건전하고 건강한 예술로 평가되기도 한다. 예술은 사기라고 하면서 지독하게 관객을 우롱하고 속이고 그 희롱을 즐길 줄 아는 관객이 많을수록 우수한 예술국가로 평가되는 세상에서 누가 어떠한 평가로 해석하고 철학적 조언을 두더라고 중요한 것은 자기의 예술로 스스로 희롱당하는 예술가가 자아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건강한 예술을 위해 건강하지 않은 예술이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모습으로 보다 적적인 표현의 방식과 평가가 타자에 의해 있어야하고 비예술의 범주가 넓어 져야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 지는 것이 이시대가 필요로 하는 존재 방식일 것이다. 예술가가 살 수 있는 양분을 향수자는 만들어주어야 예술이든 비예술 이든 이 지역에서 성장을 하고 동행을 하게 되는 것이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물화되어 동일시 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예술가와 향수자, 예술작품 사이의 순환의 길을 끊임없이 수행하여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사유해낼 수 있을 때 예술은 모든 존재의 진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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