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자궁 같은 법이 머무는 곳의 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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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자궁 같은 법이 머무는 곳의 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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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1.2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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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팔상전 국보 제55호-

법주사, 우리나라 유일한 5층 목탑 팔상전(捌相殿) 가람 배치 중심
1968년 해체수리시 기둥받친 심초석에서 사리장치 발견 ‘탑’ 규정

충북의 국보 코드 읽기
김덕근 시인·충북작가 편집장

속리산은 예로부터 해동팔경의 하나로 소금강으로 불리었습니다. 백두대간 한남금북정맥이 분기한 산으로 봉우리가 아홉 개이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하지요. 충청도 보은하고도 속리산은 한때 추억이 담긴 빛바랜 사진 한 두 장은 가지고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 수학여행지이자 신혼여행지이였습니다.

속세를 떠난다는 속리산의 이름은 부르기만 하여도 초발심을 내게 합니다. 이속(離俗)을 위한 속리행의 관문은 말티재 부터 시작되고,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출구이기도 합니다. 정이품 관직이 있는 연걸이 소나무를 지나 오리숲에 이르면 세속의 얽매임도 어느새 가벼워집니다.

▲ 1950년대 속리산 수학여행 단체사진. 미완성의 미륵불이 팔상전 뒤로 보인다.

호서제일가람이라 쓰여 있는 일주문은 기둥이 하나입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성속(聖俗)의 공간이 경계 지어지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절 밖의 세속과 절 안의 세계가 둘이 아닌 하나 즉 불이(不二)를 뜻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이 문을 통과하면 진리를 깨닫고 본성을 되찾으라는 ‘문 아닌 문’이면서, 법의 도량으로 들어서라는 다짐과도 같은 것이 일주문인거지요. 얼마나 많은 고승대덕과 시인묵객이 이 문을 지났을까요.

사내천을 따라 터벅터벅 홀로 숲길을 걷다보면 비움과 텅빔의 길로 들어 마음이 성성해지게 될 무렵 수정교가 보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법이 머무는 가람’에 들어서는 셈이지요.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속리산에는 여덟 다리(八橋)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첫 번째 다리가 수정교입니다.

법주사 불국토의 통로, 삼청동

수정교는 “비각이 있어 이 누각을 통해 다닌다”고 한 것을 보면 송광사의 삼청교와 같은 무지개다리였을 것입니다. 지금과 다르게 지붕이 있어 한층 더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도 다리를 이루고 있던 돌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는 것을 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사찰 입구 다리는 효용적인 면을 떠나, 불국토의 진입을 위한 통로일 겁니다.

속리산을 다녀간 많은 시인묵객들은 이 계곡을 삼청동이라고도 했습니다. 신여(信如) 스님은 “삼청동 가는 길은 아홉 굽이/물을 건너는 다리는 여덟 개/ 단풍은 다리 아래 푸른빛을 시기하니/온산의 단풍잎 소나무가지에 피어 있네”<수정교>라는 멋진 시를 지었습니다. 아홉 굽이(九遙)의 산모퉁이를 돌아 흐르는 물길에 있는 수정교의 전경을 멋지게 담았습니다.

시샘할 정도로 맑은 물빛에 단풍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만산홍엽이 소나무 가지사이에 빛나고 있습니다. 청색과 홍색의 그물이 선명해 가을의 빛을 모두 담아 풍성해보이지만, 이제 수정교를 건너면 세속번뇌는 놓아주어야 합니다.

▲ 1910년대 법주사 전경 팔상전을 중심으로 남북축을 볼 수 있다.

충청도 관찰사 함부림(1360-1460)도 ‘우연히 삼청동에 들렸더니/세상일 시끄러운 것 모두 잊었네/’<법주사>라는 사찰제영시를 남겼지요. ‘삼청동’은 속리산으로 들어오는 계곡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도교에서는 최고의 이상향의 장소를 말합니다.

일찍이 속리산은 탈속선경의 장소로 무궁의 터전으로 알려졌기에, ‘이화동’과 ‘우복동’이라는 이상향의 장소가 있다는 전설이 널리 전승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속에서 일어나는 슬픔과 기쁨을 잠시 뒤로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법이 머무는 절간입니다.

정유재란 소실뒤 사명당 중창

법주사에 도량에 들어서서 금강문-천왕문을 지나면 오층의 전각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전각이다 탑이다’를 가지고 내기도 하는데 팔상전이라는 이름 때문이지요. 팔상전이 있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법주사 팔상전은 팔상도가 전각에 있지 않고 탑파 안에 있습니다. 이름 또한 별나서 팔상전(八相殿)이 아닌 팔상전(捌相殿)인데, 모두 여덟을 의미하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전각의 이름은 그냥 지은 것 같지 않습니다. 원래 탑의 기능이 약해지고 예배당의 역할이 커지면서 전각의 이름을 수용한 것 일 수도 있지만, ‘상(相)을 깨뜨리다’말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팔상전에 들어오기 전에 마음이 지어내어 얽매인 것들을 비우라는 거지요.

팔상전의 온전한 비밀을 알게 된 것은 1968년 해체수리 과정에서입니다. 목탑에서 가장 중요한 기둥이 심주(心柱)인데, 우주의 중심축과 같은 것이지요. 팔상전이 탑으로 확인 된 것은 바로 심주아래 심초석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서입니다. 사리함 내부 동판이 타임캡슐과도 같은 탑지성격을 지녔기에 팔상전의 이력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지요.

동판의 명문을 보면 정유재란 당시 팔상전은 왜인들에게 소실되었고, 1602년 중창의 중심에 사명당 유정이 관여했음 알 수 있습니다. 탑지에 “조선국승대장 유정비구(朝鮮國僧大將 裕淨比丘)”라는 점선으로 새긴 명문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裕淨’은 ‘惟政’과 다르지만 음이 같고 조선국 승대장이라는 직함을 쓴 경우 흔치 않았기에 사명당으로 보는 거지요.

전란 후 어려운 여건과 대작불사인지라 20여년의 공기는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탑지에 나온 팔상전 불사 사부대중의 기록은 총 115명에 이릅니다. 이들 중 승려가 88명, 속인이 26명인데, 팔상전불사의 재목과 물자 및 사리장엄구를 시주하고 발원을 세웠습니다. 전후 다시 탑을 세운다는 서원 아래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동참발원 서원을 세웠을까요.

법주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석탑이 없습니다. 팔상전이 목탑으로 금강문에서부터 대웅전까지의 남북축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용화보전이 있었던 시절에는 동서축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만큼 법주사 가람배치에서 팔상전의 위계를 알 수 있지요.

탑은 원래 탑파라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스투파(Stupa)라는 반원형의 무덤에서 발전하였는데, 부처를 상징하는 대상이자 열반을 의미합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이면서 부처의 가르침이 가득한 곳이 불탑인 것이지요. 탑은 모든 번뇌와 업장이 소멸된 열반의 의미를 하나로 모아 불멸의 부처가 영원히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불탑을 세운다는 것은 석가모니에 대한 공경의 의미와 중생이 가지고 있는 탐욕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고 현세의 발원을 이루기 위한 공양입니다. 팔상전은 우리나라 유일의 5층 목탑으로 부처의 상징이자 법주사 경관의 좌표로서 장엄한 화엄세계를 침묵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팔상전은 도량석이 시작할 때부터 모든 참배객이 돌아갈 때까지 적멸과 구도의 열정을 돌아보게 합니다.

▲ 법주사 팔상전.

팔상전 21.6m, 수직의 위엄성 갖춰

팔상전은 21.6m 오늘날 건물의 8층 정도의 높이니까 결코 낮은 높이의 탑은 아니지요. 옛 사람의 속리산 유산기에도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팔상전에 대하여 높이에 이목을 집중하는 듯합니다. “절을 둘러보니 소위 오층의 팔상전이 우뚝 솟아 있다. 높은 천장 모서리는 백겁이 지나도 하나도 기울거나 무너지지 않았으니, 다만 내가 온 나라를 통틀어 보아도 이런 것은 있지 않은 것이었다”(정행석 ‘俗離南遊錄’ 1634년) “팔상전은 특별히 5층인데 그 높이가 가히 백길이나 된다”(조경 ‘俗離紀行’ 1747년) “오층각(팔상전)이 은은하게 수정봉과 높이를 다투니”(이상수 ‘遊俗會遇記’ 1862년)라고 당시 선비들에게 팔상전이 보여주는 수직의 위엄성이 컸던 만큼 과장되게 표현했을 것이고, 그 높이는 청정한 마음의 원력과 같은 거지요.

팔상전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으로 하나의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세울 수 있는 당시 최고의 기술의 담긴 고도의 영적 건축물인지도 모릅니다. 팔상전은 목탑의 원형에서도 본다면 특유의 탑의 체감율을 보여줍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칸의 크기와 높이가 줄어 위로 솟구치는 상승감이나 경쾌감은 없습니다. 체감율이 크기 때문에 안정감이나 당당함은 물론 주변 경관과의 친밀감을 볼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처마곡선으로 사찰의 배경과 자연스런 조화도 팔상전이 주는 아름다움이지요. 팔상전의 탑신에서 수직적인 일본탑이나 고준함이 중심인 중국탑의 조형을 볼 수 없습니다.

예배공간 전각에 팔상도 모셔

법주사 팔상전은 다른 사찰의 팔상전과는 달리 불사리봉안의 불탑과 예배공간으로서 전각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공간인 팔상전에는 팔상도가 모셔져 있지요. 팔상도란 부처님의 탄생으로부터 열반에 이르는 장면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팔상도라고 하는데, 민중들에게 포교를 쉽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린 것입니다. 팔상도를 보기 위해서는 탑전 내부를 한 바퀴 돌아야합니다. 동으로서 시작하여 남-서-북으로 돌면 저절로 열반상까지 오게 되니 자연스레 성지순례를 마치게 되는 셈입니다.

팔상도 주제는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탄생-출가-수도-열반으로 탄생 관련도에는 불타의 탄생을 다루고 있는 도솔래의상·비림강생상과 출가관련도에는 태자가 왕궁에서 나와 성자가 되기 위한 전환을 보이는 부분으로 사문유관상·유성출가상이 있습니다. 수도관련도에는 힘든 고행을 거친 후 보리수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부분으로 설상수도상·수하항마상과 열반관련도에는 초전법륜 이후부터 사리쌍수 아래에서 열반하기까지의 장면으로 녹원전법상·쌍림열반상이 있습니다.

팔상전에서는 각각 네 벽에 두 개의 그림을 한 장에 담에 모두 여덟 개의 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팔상도는 1897년 당시 주지였던 탄응선사가 화주가 되어 약효(若效), 정련(定鍊) ,봉수(奉秀), 봉화(奉化) 등의 스님들이 그린 것인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3.4도와 7.8도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그래도 전체 그림의 배치는 우요삼잡(右繞三?)의 전통에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안에서 탑돌이를 할 수도 있고, 밖으로 나오면 가람의 마당은 넓고 평평하여 탑돌이 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탑돌이는 초파일이나 큰 재(齋)가 있을 때 승려와 신도들이 탑을 돌면서 부처의 공덕을 기리고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것으로, 사찰에서는 각별한 의식입니다. 바른 믿음으로 팔상전 주위를 돌기만 해도 그 공덕은 더 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지요. 탑을 돌며 피안을 건너는 바라밀수행은 차안과 피안에서 열반의 세계로 가는 방편의 하나이자 보살의 수행덕목입니다. 개인의 안녕과 기원, 탑돌이 행위는 열반의 피안을 염원하는 수행이자 놀이인 것이지요. 처음에는 승가와 개인에 의한 단독의식으로 시작해서 사하촌의 사부대중이 모여 부처의 공덕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연행의식으로 된 거지요.

▲ 팔상전 사리함에서 발견된 은제 사리병.

법주사 ‘탑돌이’ 무형문화재 지정

범패소리에 바라춤, 나비춤을 추는 스님을 따라 인연의 긴 실타래를 풀 듯 긴 행렬이 바로 법주사 탑돌이 공양이었습니다. 악귀를 쫓고 도량을 청정하게 마음을 정화시키거나 불법과 불전을 상징하는 춤사위들이 탑을 중심으로 유장하게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던 거지요. 탑돌이는 탑을 3회 도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만다라를 그리면서 탑돌이 연행을 했습니다. 무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된 법주사 탑돌이는 팔상전을 중심으로 다른 사찰과 달리 십바라밀정진도를 본 뜬 것이 특징입니다. 법주사의 탑돌이는 십바라밀에서 구름으로 상징되는 선정바라마밀을 제외한 아홉가지로 이루어집니다. 해인십바라밀도나 건봉사의 바라밀석주에 있는 도형을 보면 어떤 모양으로 탑돌이를 돌았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탑돌이는 먼저 보시(布施)는 보름달모양, 지계(持戒)는 반달모양, 인욕(忍辱)은 신발의 날모양, 정진(精進)은 가위모양, 지혜(智慧)는 금강저모양, 방편(方便)은 좌우 우물모양, 원(願)은 전후 우물모양, 역(力은) 이중담장모양, 지(智)는 별 속의 달 모양의 장엄한 군무로 끝나게 됩니다. 십바라밀을 따라 정진 수행하면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각각의 바라밀이 상징하는 도형을 따라 탑돌이를 하는 것은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의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탑돌이를 하던 시절 탑은 사하촌사람들에게는 삶의 중심에 있었을 것입니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친근한 벗이자 한바탕 흥겹게 놀이도 할 수 있는 판이 탑돌이였을 테니까요.

탑돌이는 무형문화재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보존차원의 공연이기에 아쉬운 점이 큽니다. 훈장처럼 달고 있는 국보니 보물이니 하는 유물의 위엄 앞에 탑돌이라는 놀이로서의 기능은 위축될 수밖에 없고, 절간은 이미 삶의 중심에서 비껴나 있습니다. 바라밀의 의미와 간절함이 없는 탑돌이는 이벤트이기 때문에 탑돌이의 생생하고 간절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새들도 별빛도 잠이 드는 밤 풍경이 잠깐 공양간에 다녀온 사이 팔상전은 오백나한과 함께 남몰래 탑돌이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참 연꽃 같네/ 이내에 포근히 쌓인 가람’, ‘오가는 사람들/차암, 편안하네/예가 바로 깊고 아늑한 지구의 자궁 속일세’(나태주:<비오는 법주사>)라고 한 시인은 법주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지구의 자궁’이라는 가람을 품은 속리산에서 생명과 법을 잉태하는 길이 끝나고 시작하는 중심에 팔상전이 자리하고 있지요. 그 자궁의 샘인 만다라와 같은 것이 팔상전이 아닐까요. 법주사의 팔상전을 통하여 사람들은 마음의 고향을 곱씹어 보기도 하고, 우주의 질서를 보면서 또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가를 알게 됩니다.

팔상전 돌계단에 앉아
무료히 담배 한 대 빼어 물었다
열려있는 금강문으로
한주먹의 하늘과 소나무 몇 그리고
한적한 수정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잘 어울린
저편 세상을 보았다

임승빈:<법주사에서>

시인이 관조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분명 떠나온 그 자리였고, 그것을 알게 된 것은 팔상전을 돌고 나서입니다. 결코 긴 시간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속리행을 하는 이유인거지요. 무료히 담배 한 대 빼 물은 순간 저 편 세상을 볼 수 있는 장소가 팔상전 돌계단이었던 거지요. 한주먹의 하늘과 소나무 몇 그루 돌아온 다시 돌아갈 수정교가 풍경으로 채워져 시인이 ‘하늘을 달리는 눈길’로 달리는 곳이기도 하고요.

팔상전이라는 목탑은 400년간 가부좌를 튼 채 여전히 나를 비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달빛이 강하게 내리는 날이나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나 묵묵히 말입니다. 팔상전은 사람들에게 분별도 시비도 걸지 않고 속리하러 온 길손을 따로 마중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수정교를 건너 일주문을 지나 말티재 너머에 있는 온 세상으로 나갈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팔상전 돌계단에 동박새가 물어 놓고 간 애기똥풀 꽃잎 몇 장이 오늘따라 너무도 환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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