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석(白石) ‘팔원(八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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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석(白石) ‘팔원(八院)’
  • 충북인뉴스
  • 승인 2015.01.2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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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시 읽기<1>

오래된 시 읽기/ 기억을 깨우는 힘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백 석(白石) ‘팔원(八院)’ (조선일보 1939년)

 

   
 

이 시를 읽으면 늘 목이 메입니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극에 달했던 1939년 관서지방을 배경으로 눈물겨운 흑백사진 한 장을 보는 듯합니다. 장안의 화재가 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의 ‘흥남철수’보다 10년 남짓 거슬러 올라간 때이니 그저 75년 정도 지난 일인데요.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몹시도 추운 아침인데, 옛 풍속처럼 품이 큰 초록 저고리를 입은 어린 계집아이가 묘향산행 승합차에 오릅니다. 일본인 순사네 집에서 몇 해고 식모살이 했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치느라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터졌는데, 잠시 쉴 틈도 없이 또 힘들게 아이보개를 하면서, 계집아이는 다시 자성으로 간다고 하지요. 자성은 평안도 최북단 압록강 국경 부근에 있는 마을입니다.

묘향산 어디에 삼촌이 산다고 하지만 알 수가 없고, 자성까지는 험준한 산맥과 얼어붙은 강을 거슬러 삼백오십 리나 된다고 하네요. 억압되고 훼손된 시대를 살아 나가야 하는 현실에 대한 공포와 피폐한 삶에 대한 고통으로 아이는 흐느껴 웁니다. 텅 빈 차 한구석에서 동족의 쓰라림으로 시인도 울지요. 그리고 지금 이 시를 읽는 우리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눈 밟는 소리 사각사각 들리는 겨울 아침, 우리 민족의 자전적 기억 속에 찍혀있는 슬픈 자화상 같은 시 한편을 읽으며 소망합니다. 이토록 역사의 질곡을 함께 헤쳐 온 남북 강산이 부디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아 하나 된 겨레의 싱싱한 생명력으로 불끈 솟아나기를.

 

<작가 소개>

시 선정과 해설을 맡은 허장무 시인(69)은 지난 2010년부터 12개월간 본지에 ‘시읽는 기쁨’을 연재한 바 있다. 1983년 시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바람연습’ ‘밀물 든 자리’ 등 두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시읽는 기쁨’는 지난 2012년 단행본으로 출간돼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림을 그린 이은정 작가(38)는 충남대에서 한국화를 공부했고 현재 청주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이 작가는 여성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작품을 발표하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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