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 유영철과 삼청 교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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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유영철과 삼청 교육대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4.07.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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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삼청교육대는 한 대 호평을 받기도 했다. 전과자나 문제아뿐만 아니라 숱한 무고한 사람들까지 붙들려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당했지만 어쨌든 한동한 '골칫덩이'들이 눈앞에서 사라젺시 때문이다. 당시 신군부가 전개한 언론플레이는 머리칼이 솟구칠 정도였다. 파렴치범 전과자들이 개과천선해서 사회의 역군으로 재닽생했다는 이른바 '인간개조'의 신화(?)가 연일 언론을 장식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기자는 초기 삼청교육대의 초병을 관리하는 병사였다. 거의 2중 3중으로 초소를 설치하고도 그것도 믿지 못해 주변 산 능선에 기관총까지 거총하고 교육 입소자들을 감시했다. 여차하면 사살해도 군바리 신분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살벌하던 그때, 고래 고래 악을 쓰며 진창을 구르는 삼청교육생들을 바라 보는 것은 제대말년의 느슨함에 바짝 긴장감을 안기는 호재이기도 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그들의 퇴소장면이다. 교육을 마친후 그야말로 다행스럽게 전방의 노력봉사로 차출되지 않고 퇴소하는 교육생들, 만세삼창은 기본이고 눈물을 질질 짜며 갖은 '액션'을 취하던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역시 신군부는 재빠르게 이를 활용했다. 이젠 범죄없는 사회에서 국민들이 맘껏 활개할 수 있는 태평성대가 도래했다고 떠들어댔다. 실제로 많은 국민들은 처음 이를 믿었다. 그러는 이는 착각이었다. 우리나라 조폭이 본격적인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바로 삼청교육 이후다. 지하로 숨어 든 '어깨' 들에게 합법적 활동의 필요성을 자각시킨 것이다. 주먼만 휘두르던 양아치가 돈과 조직과 사업을 관리하는 세련된 조폭으로 변신하는 결정적 빌미가 된 것이다.


 범죄는 잡아 들이고 족친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학에선 범죄를 사회의 한 구성원인으로 해석하기까지 한다. 어찌보면 일탈(逸脫)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완벽한 사회, 아무리 통제된 사회에서도 범죄는 존재한다. 다만 이를 줄이고 억제하는 것이 국가의 과제이고 그 관건은 사회적 통합이다. 실제로 빈부격차가 덜하고 복지제도가 잘된 나라일수록 범죄의 발생 빈도가 적다는 것은 통계로도 나와 있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때문에 국민들의 충격지수가 엄청나다. 그 짧은 기간에 20여명을 처참하게살인하고도 태연히 상황을 재현하는,  그것도 부족해 무슨 과업이라도 이룬냥 우리 사회를 향해 점잖게 충고까지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국민들은 할말을 잊었다. 언론은 그에 대해 일말의 동정도 있을수 없다며 핏대를 올리고, 정부는 정부대로 강력사건의 총등수사부터 검사를 참여시키겠다느니 파렴치 범죄에 대한 수사인력을 대폭 늘리겠다느니 하며 발빠른 대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삼청교육대적 발상은 또 조만간 흐지부지될 게 뻔하다. 사회적 책임을 간과하고 무조건 범죄자만 난도질 해 봤자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이다.
 
 유영철이 내 보인 여성과 부자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은 안타깝지만 학습효과의 산물이다. 하루 저녁에 수백 수천만원을 흥청망청 술값으로 날리는 천박한 풍요와, 아기 분유값이 없어 도둑질을 해야 하는 생존의 좌절감이 서로 대척점에 공존하는 한 우리 사회엔 잠재적 유영철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다. 연쇄살인의 원흉은 나만 있고, 네가 없는 우리 사회의 이기적 배타성이다. 범죄를 예방하는 것은 삼청교육대도 아니고 사정당국의 서릿발도 아니다. 사회적 통합, 선진국을 향해 가는 21세기의 한국사회가 풍어야 할 최대 과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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