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 신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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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신선되다.
  • 김기현 시민기자
  • 승인 2004.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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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흥이 두꺼비 그림과 하마선인도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믿기지 않는 일들은 세상의 도처에서 일어난다. 이란에 사는 한 여성이 개구리인지 두꺼비 인지를 낳아 화제가 되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이 여성에게서 개구리가 나왔는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물웅덩이에서 수영 중 올챙이가 여성의 몸으로 들어가 '어른 개구리'로 자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무튼 화제는 화제다. 

   
▲ 김기현의 작품으로 원흥이 두꺼비를 캔버스에 유채그린 것이다. 2004년 작품으로 이미 신선이 된 두꺼비 부부의 아름다운 짝짓기 그림이다.
 우리 옛사람들은 집지킴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었다. 집 지킴이는 한 집안의 호신 같은 존재이다. 구렁이, 족제비 같은 동물이 집안에 들어앉으면 재앙을 막아주고 복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런 동물은 집안의 쥐나 해충을 멀어치워 좋은 역할을 하기도 하다.
 누구나 집 지킴이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지킴이 역할을 하던 구렁이를 잡아 죽였더니 한 집안이 패가망신 했다는 이야기는 어느 마을에나 흔한 것이었다.

 두꺼비도 대표적인 집지킴이의 하나였다. 이름처럼 두껍고 우둘투둘한 피부가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행운을 가져다주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상서로운 동물이었다. 아이들은 모래집을 지으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정다운 노래를 불렀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할머니 곁에 누워 자신을 길러 준 처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구렁이와 대결을 벌인 용감한 두꺼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옛 사람들은 달에서 두꺼비를 보았다. 달 표면의 얼룩덜룩한 무늬에서 두꺼비의 모습을 그려냈던 것이다. 항아라는 여신이 전설 속의 영악을 훔쳐 먹고 도망가다 두꺼비로 변했다는 신화는 고구려의 고분벽화, 신라의 와당, 조선시대의 불화에 새겨졌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달에 두꺼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와 함께 장독대 옆 넓적한 돌멩이를 들추면 언제나 ’나 여기 있소‘하고 몸을 부풀리던 두꺼비가 지금은 우리 앞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두꺼비는 개구리와는 달리 뒷다리가 짧아 뛰지 않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 동작이 아주 느려 걸을 때도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폼이 게으름뱅이 같지만, 파리나 모기 등 먹이가 날아가면 아주 재빠르게 혀를 뻗어 잡아먹는다. 이처럼 평소에 동작이 느려도 일이 생기면 아주 빨리 하는 경우를 빗대어 ‘두꺼비 파리 잡아 먹 듯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 조선 후기 현재 심사정의 하마 선인도(蝦磨仙人圖), 비단에 그,린 수묵담채로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두꺼비와 노는 이그림은 간결한 탈속적 필체에서 무구한 자연의 근원과 힘이 느껴진다.
두꺼비 그림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중의 하나이다. 그 중에서 조선후기 화가인 현재 심사정의 하마선인도(蝦磨仙人圖)다.
'하마'란 두꺼비의 한자어이며, '하마선인'은 두꺼비를 가진 신선이라는 뜻이다. 신선도의 일종으로서, 신선전(神仙傳)에 의하면 유해(劉海)라는 신선은 세 발 달린 두꺼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두꺼비는 그를 세상 어디든지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두꺼비는 가끔 우물 속으로 도망치곤 해 그는 두꺼비를 금전(金錢)이 달린 끈으로 끌어올리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꺼비는 재물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중국에서도 역대에 걸쳐 많이 그려졌다. 호방한 필묵법으로 그려진 이 그림에서도 돈이 달린 듯한 끈으로 세 발 달린 두꺼비를 희롱하고 있다. 선인에서는 간략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는 선종화의 특징이 보인다. 일정한 윤곽이 아닌 넓은 붓질로 처리한 옷은 하나하나는 산만하게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표현 효과가 강렬하여 그의 개성이 역력히 드러나 보인다. 윤곽선들은 붓이 아닌 지두화(손가락이나 손톱으로 그리는 그림)로 그려 더욱 속도감이 느껴진다. 일종의 크로키와 같은 필법이다. 속기를 끊고 무구한 자연의 근원적 힘과 하나가 되어 유희하는 신선의 모습은 영원한 인간의 이상성을 바라보고 있다 디오니소스적 힘의 내재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미물에서 도교적 사상을 화면에 담고 있다.

 원흥이의 두꺼비를 필자가 그렸다. 두터운 질감으로 두꺼비의 느린동작을 느낄수 있고 은은한 색감과 두 마리 두꺼비의 표정에서 이미 신선으로 자연의 이치를 읽고 있다. 짝짓기를 하는 두꺼비의 모습에서 종족의 번식본능이전에 음양의 이치를 터득하는 구도적 자세로 보아지고 싶다. 원흥이는 그래서 잊혀진 이야기들이 소록소록 새롭게 배어나곤 한다. 개구리 낳은 여성보다 더 깊게 생각해야할 우리의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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