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니가타에 휘날린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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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니가타에 휘날린 태극기
  • 충청리뷰
  • 승인 2015.08.2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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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생각한다/ 김승환 충북대 교수
▲ 김승환 충북대 교수

태극기였다. 2015년 8월 7일의 어두운 밤을 비추는 그것은 분명히 태극기였다. 태극기 곁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동아시아문화도시에 오신 포럼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태극기를 본 일행은 놀라는 동시에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아시아문화도시인 일본의 니가타(新潟)에서, 그것도 조직위원회가 아닌 호텔 입구에 설치된 사람 키 높이의 태극기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배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감사하다고 말한 다음 어떻게 저렇게 큰 태극기를 설치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겸손하고도 친절하게, ‘우리 숙소에 온 손님에 최선을 다하고자 설치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약간 더 당황스러웠다. 순간 일본인들의 혼네가 떠올랐다. 본래 자기의 음이라는 의미의 혼네(本音)는 가면을 쓰고 타인을 배려하는 음인 타테마에(建前)의 반대 개념이다. 대체로 일본인들은 상대에게 실례되는 언행을 하지 않으며, 언제나 조심하고 삼가면서 매우 친절하다. 그 원리 중의 하나가 자기를 낮추고 감추는 혼네와 타테마에다. 그러므로 ‘태극기 설치의 혼네는 과연 무엇인가?’를 분석적으로 사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몇 초 동안에도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는 지배인에게 언제, 어떻게 설치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지배인은 엊그제 주문하여 처음 설치했다는 답과 함께, 태극기를 만드는 동안 한국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여전히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답변이었다.

나는 니가타시 동아시아조직위원회에서 그런 요청이 있었느냐고 다시 물었다. 돌아온 답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간장선생>이라는 일본영화가 떠올랐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1998년 작 <간장선생>은 1945년 히로시마 근처의 어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사인 아카기는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져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일본이 항복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장기인 간장(肝腸) 치료에만 몰두한다. 그 간장선생(肝腸先生)의 자세가 바로 태극기를 설치하게 만든 성실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세는 또 다른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일본인이 청주에 왔을 때 일본인이 머무는 호텔 입구에 큰 일본 국기를 설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 때문이다.

포럼에 참가한 두 세 분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한국에서 그 정도 크기의 일장기(日章旗)를 실외에 게시하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결론은 그날 진행된 ‘동아시아문화공동체의 전망’이라는 토론 주제를 상기시켰다. 포럼에서 청주와 니가타의 토론자들은 동아시아 삼국이 가진 문화유전인자(Cultural gene)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함께 평화와 번영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또한 세 국가는 조화, 평화, 상생, 협력의 동질적 문화공동체라는 사실에도 동의했다. 그런 다음 중국, 한국, 일본은 문화를 통한 동아시아공동체를 설계하여 군사적 패권, 제국주의적 지배, 정치적 정략(政略), 경제적 수탈이 아닌 상호존중과 평화번영을 전망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충북청주의 토론자들은 일본패권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과 제국주의파시즘을 반성하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음은 물론이다.

한국, 중국, 일본의 문화부장관들이 합의하여 결정한 2015년 동아시아문화도시가 청주, 칭다오, 니가타다. 이를 계기로 세 도시는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희망의 은하수를 놓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진 상대에 대한 혐오감정은 치유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해 있다. 특히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일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한편, 그 원인이 일본에 있다고 목청을 높이면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가지되 무조건의 적대적 민족감정은 한국인에게 현명하지도 않고 유리하지도 않으며 올바른 것도 아니다. 역사적 은원은 잊지 않아야 하겠지만 한국의 호텔에 일장기를 걸 수 있는 아량과 자신감과 상호존중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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