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계몽하지 못하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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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계몽하지 못하는 가족
  • 충청리뷰
  • 승인 2016.01.2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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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에 걸친 정씨 집안의 이야기 다룬 <계몽영화>

영화로 말하는 세상
윤정용 영화평론가

 

▲ 계몽영화 2009 제작
감독 박동훈
출연 정승길, 김지인, 오연아, 정이도

요 몇 년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시끄럽고 답답한 상황에 처해 있다. 각각의 문제의 원인이야 모두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고 상대방을 가르치고 훈계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커지고 해결책이 요원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답답한 와중에 갑자기 몇 해 전 보았던 <계몽영화>(2009)라는 제목의 영화가 생각나서 그 때 써놓았던 영화 일기를 들춰본다.

영화라는 예술이 주로 인간의 ‘감성’의 측면에 기대에 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계몽’과 ‘영화’라는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영화 제목으로는 더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계몽영화>는 3대에 걸친 정씨 집안의 얘기를 시간을 오가며 풀어 놓는다. 먼저 시간 순으로 1931년 서울. 조선 식민 수탈의 전초기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일하는 정길만은 일본인 상관으로부터는 업무와 관련해 자주 질책을 받고 동료로부터는 무시를 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독립운동가 친구가 찾아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에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정길만은 그 정보를 상부에 보고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1965년 서울. 정길만의 아들 학송은 반듯한 회사에 근무하며 여교사인 박유정과의 네 번째 데이트에서 티파니 반지를 선물로 주며 프러포즈에 성공한다. 다시 1985년의 서울. 학송의 어린 딸 태선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술심부름과 카라얀 연주회 녹음을 도맡아 하지만, 아버지의 일상적 폭력에 노출되고 있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 마지막으로 2010년의 현재의 서울. 아들의 조기교육 때문에 미국에 머물던 태선은 오빠 태한에게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정학송의 죽음으로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벌어지는 소소하지만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이 <계몽영화>의 씨줄과 날줄이 되고 있다.

<계몽영화>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시대극의 전형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 역사를 이야기의 큰 줄기로 삼는 많은 시대극은 주로 정치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인물들의 ‘중심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역사를 주변부 인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 영화 속에서의 정길만의 집안은 어찌 보면 평범한 가족이다.

시대극 전형 벗어난 스토리

주인공 정길만은 친일파의 거두도 아니고,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립 운동가를 고문한 악질 순사는 더 더욱 아닌, 자신이 맡은 바를 묵묵히 성실히(?) 수행하는 전형적인 소시민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정학송의 처 박유정은 병상에 누워 있는 정학송이 그의 아버지가 친일인명 사전에 등재되는 문제로 심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자식들에게 전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정길만이 친일파였냐, 친일파가 아니었냐는 중요하지 않다. 감독은 이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유보하고, 대신 관점을 달리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 했던 역사적 주변부 인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살펴보고 생각하도록 추동한다.

다시 영화 속으로 돌아가면, 정길만은 무능한 식민지 조선 관리에서 독립 운동가 친구가 선의로 알려준 폭탄 투척 정보를 상사에게 보고해 출세를 한다. 그의 아들 학송은 아버지의 안정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와 조건이 비슷한 박유정과 결혼해 일찍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상사에게 뇌물을 주고 당시에 법으로 금지되었던 과외를 자식들에게 시키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아들과 딸 태선 역시 부모의 이런 속물적 세계관을 답습한다.

감독은 <계몽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정씨 일가족 각각을 비판하지 않고, 단지 그들의 생각과 행동만을 보여줄 뿐 직접적인 판단을 유보한다. 결국 영화 속에서 그들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계몽, 또는 교화하려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의 계몽에는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도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군가를 계몽시킬 수 없다는 간단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계몽하려고 하지만 그 행동은 지극히 자신의 이익과 개인의 욕망내지 자존심에서 비롯된 행위일 뿐이다. 계몽가를 꿈꾸는 그들은 겉은 반듯하게 보이나 항상 외롭고 걱정에 휩싸여 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계몽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소외됨으로써 자신들이 정한 틀에 갇혀 버리고 만다. 감독은 그들의 생활상을 통해서 일반적이고 옳다고 여기고 계몽하려는 이들의 의지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의문을 던진다.

번번이 계몽이 실패하는 이유는

<계몽영화>는 중간 중간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무겁고 생각을 많이 하도록 일깨우는 영화이다. 스스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고 성찰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결말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학송의 장례식이 끝난 뒤 집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태한은 문 열쇠만 고쳐서는 안 된다는 열쇠 수리공의 말에 적당히 고쳐보자고 제안을 한다. 그에 반해 태선은 문을 바꾸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태한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면 된다는 인생관을 가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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