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훈민정음 해례본, 각종 영인본 및 복간본·교예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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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훈민정음 해례본, 각종 영인본 및 복간본·교예본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 승인 2024.05.0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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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훈민정음 연구의 바탕…송석하 모사본의 가치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고 간송 전형필이 소장한 뒤. 그 실물이 1946년 이전에 일반 공개된 적은 없다. 그 또한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해례본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전형필의 태산 같은 전략이었다.

다만 간송은 극히 일부 전문가에게만 연구용 필사본을 허용했는데 그것이 송석하(宋錫夏) 모사본이다. 이 모사본을 바탕으로 홍기문은 해례본 전문을 활자본으로 1940년 10월 15일, ≪정음≫ 35호(-22쪽)에 실었다. 또 다른 활자본은 1942년에 나온 최현배의 ≪한글갈≫(정음사)에도 실린다.

송석하 모사본의 실체가 처음 언급된 것은 1940년 12월에 발표된 정인승의 '고본 ≪훈민정음≫에 대하여(≪한글≫ 82호, 조선어학회, 3-16쪽)'를 통해서였다. “모사본은 민속 고고학의 태두인 송석하 씨의 특지(特志)에 의하여 벌써 사학(斯學) 동호간(同好間)에 연구의 자료로 제공되어 있다. 필자 또한 씨의 특별한 호의에 의하여 일찍 7월 중순에 일독(一讀)의 행영(幸榮)을 입었다.”라고 밝혔다. 송석하 모사본의 실체는 안병희(2007)의 '송석하 선생 투사(透寫)의 훈민정음(訓民正音)(≪한국어연구≫ 4. 한국어연구회. 127-130쪽.)'에서 밝혀졌다.

왼쪽, 송석하 모사본(1940)_안병희(2007). 가운데, ≪정음≫ 35호(-22쪽)에 실린 해례본 전문 1쪽. 오른쪽, ≪한글갈≫(1942)에 실린 해례본 전문 1쪽.

송석하 모사본은 일제강점기 해례본 번역과 초기 연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방종현과 홍기문의 최초 번역(7.30-8.4, 조선일보)과 대중적 전문 소개(≪정음≫ 35호/1940, ≪한글갈≫/1942)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1940년 12월에 발표 해례본에 관한 세 편의 글로 이어지기도 했다.

양주동(1940)은 '신발견 <訓民正音>에 대하여(≪정음≫ 36. 조선어학연구회. 9-10쪽.)'라는 글에서 “새로이 발견된 해례에 의하여 정음 28자의 제작과 그 구성이 자형(字形), 자음(字音) 어느 방면으로 보거나 얼마나 이론적·합리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또한 얼마나 치밀·탁월한 성음학적·문법학적 견해와 지식 밑에서 수행되었는가를 알기에 족하다.”라고 해례본 가치의 정곡을 찔렀다.

신태현(1940)의 '훈민정음 잡고(雜攷):제자원리와 모음조화(≪정음≫ 36. 조선어학연구회. 11-13쪽.)'에서는 전형필 소장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정인승(1940)은 소논문 수준의 '古本訓民正音의 硏究'를 ≪한글≫ 82호(조선어학회. 3-16쪽.)와 ≪문장≫ 2호(문장사. 139-152쪽)에 동시에 실어 원본 고증과 실록본, 언해본과의 차이를 밝혔다.

최현배(1942)의 ≪한글갈≫은 출판사 선정 문제로 1942년 4월 30일 출간되었지만, 실제 집필은 1940년에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최현배는 간송본이 원본임을 입증하고 아울러 앞 두 쪽이 진본이 아님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진본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로 세종 서문 마지막 글자가 ‘矣’를 지적했다. 진본은 세종실록과 언해본에 있듯이 ‘耳(따름 이)’이다. 간송본 앞 두 장은 진본이 아닌데 특히 첫째 장은 이와같이 실수가 많았다. 문화재청이 2007년에 진본 복원안을 기준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이 있다.

<그림 1> 해례본 간송본(1940)과 정본 복원본(2017 문화재청) 오류 비교.

빨간색은 간송본 보사 부문에서 잘못된 구두점이고, 초록색은 사성 권점이 빠진 경우다. 보라색은 구두점이 빠져야 하는 경우이고 파란색은 한자가 잘못된 경우다. <矣/어조사 의→耳/따름 이> 이런 실수나 문제에도 불구하고 간송미술관은 앞 두 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소장 당시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한 역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앞 두 장 네 쪽을 제외하고는 진본이므로 앞 두 장이 진본이 아니라고 뜯어고치기보다 발견 당시의 역사를 지키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이는 문화재 보호와 보존의 미담 사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전형필은 해방 전에는 전문가들을 통해 해례본의 가치를 알려 암울한 식민지 조국에 빛을 던져줬다. 한편으로 일제로부터 철저히 보호해 해례본이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고 광복을 맞이했다.

각종 영인본, 해례본을
 세상에 널리 알리다

해례본이 제대로 세상에 드러난 것은 해방 후인 1946년이었다. 조선어학회 임원들은 원본 영인본 공개를 간송에게 요청했다. 간송도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직접 영인본 제작을 도와 영인본을 펴냈다. ‘조선어학회’는 1949년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기에 1946년 영인본은 조선어학회 영인본으로 부른다. 영인본은 “원본을 사진이나 복사, 스캔 등의 방법으로 복제한 인쇄물”을 가리킨다. 영인본은 원본을 안전하게 보존하면서 원본의 내용과 가치를 널리 알리는 출판 방식이다. 영인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영인본이 있게 마련이다.

1차적으로 모든 영인본은 원본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사진을 찍거나 스캔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스캔한 것도 사진기가 아닌 스캐너라는 기기를 이용한 것일 뿐 결국 사진을 찍은 것이므로 이것도 일종의 사진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사진을 찍은 것을 있는 그대로 영인하는 '실사본'과 글자 이외의 부분을 다듬는 '수정본(다듬본, 교정본)'이 있을 수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으므로 어느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인본 이용 목적에 따라 달리 이용할 수 있다.

해례본의 최초 영인본은 수정본 방식이었다. 10월 9일 한글날에 맞추어 간송본 크기(20*29cm)보다 조금 더 큰 크기(22*30.5cm, 필자 소장본 크기, 판형은 두 개 이상 존재)와 간송본의 사침 제본은 오침 제본으로 바꾸어 출판되었다. 한글학회 100년사(595쪽)에서는 1948년 인쇄본부터 방종현 해제를 별책으로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별책 해제 자체에는 단기 4279년 곧 1946년 10월 9일로 되어 있다. 방종현(1946)은 해제에서 영인본 발간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누구나 다 가져야 할 것이니, 가지되 소중히 지니어야 할 것이요, 누구나 다 읽어야 할 것이니, 읽되 정밀(精密)히 깨달아야 할 것이어늘, 원체가 희귀함에야 어찌 하리요? 여기서 단 하나뿐인 이 전형필(全鎣弼)씨 소장의 진본(珍本)을 진본 그대로 누구나 가질 수 있게 하고 누구나 읽어 볼 수 있도록 하게 하고자 하여 이 영인본(影印本)을 내게 됨이니, 특히 이 일이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을 기념하게 됨에 있어서야 더욱 의미 있다고 할 것이다.”

1946년은 해례본 간행(1446) 500주년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김윤경(1955)의 '훈민정음의 장점과 단점(≪자유문학≫ 1-2. 자유문학자협회. 89-97쪽)'에 의하면 1만 부를 발행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까지 보급하였다. 1만 부는 한꺼번에 찍은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찍은 것으로 보이지만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영인본은 최초 영인본으로서 의미는 있으나 실제 그대로의 사진 영인본이 아니고 일종의 수정본이라는 한계가 있다.

복간본, 원본과 소통
  품격을 높이다

이러한 수정본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취지의 사진본이 1957년 통문관에서 동시에 이상백(1957)의 ≪한글의 기원≫, 김민수(1957)의 ≪주해 훈민정음≫의 부록식 영인본으로 두 책이 나왔다. 이는 이겸로 대표가 전형필에게 직접 부탁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자세한 내막은 이겸로(1975)의 '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고희년을 맞으며(≪보성≫ 9호)'에 실려 있다. 이 또한 간송이 인쇄 과정을 직접 주관했다고 한다. 간송이 원본 보존에 얼마나 힘을 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영인본은 기존의 수정본과는 달리 실물 상태를 거의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본이라 가치가 있었다. 2015년 복간본이 나오기 전까지 비록 축소된 것이지만 실물 그대로 찍은 사진본이라 훈민정음 연구의 핵심 문헌 역할을 했다.

1957년의 통문관 영인본과 더불어 훈민정음 연구의 바탕이 된 책은 한글학회에서 1997년에 펴낸 수정본 형식의 영인본이 나오면서였다. 통문관 영인본은 흑백 인쇄이고 단행본 부록으로 실려 있어 해례본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한글학회에서는 1997년에 해례본과 같은 단행본 방식으로 소장용 고가(10만 원) 수정본으로 해성사에서 허웅 해제로 펴냈다. 이 영인본은 조선어학회 1946년 영인본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제 자루매기 제본에 의해 판심(版心)을 살리고 옛날 제본 방식 그대로 펴냈다.

해례본이 중요하다 보니 이렇게 다양한 이본이 생성되고 유통되었다. 그만큼 해례본이 다양한 방식으로 읽히고 그 의미를 나눈 셈이다.

윗줄 왼쪽부터 1946년 조선어학회 영인본, 1957 통문관 영인본, 아랫줄, 1997년 한글학회 영인본, 2015 교보문고 복간본.

영인본은 사진본이든 수정본이든 해례본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어서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직접 원본과 똑같은 크기, 색깔, 제본법 등을 살려 복간본을 2015년 교보문고에서, 2023년에는 가온누리 출판사에서 각각 복간본을 언해본과 함께 김슬옹 해제로 펴냈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소장자인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직접 복간본을 펴내는 것은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가치를 좀 더 깊고 넓게 나누기 위해서다. ‘복간본’은 원본에 준해 다시 간행한 것이므로 원본의 품격을 대중적으로 나누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이번 복간본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제작하였다.

첫째, 책 크기와 종이 상태 등은 첨단 사진을 통해 원본과 최대한 같도록 복간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전통 인쇄용 한지를 이용해 인쇄하였으며 색깔과 크기를 간송 원본과 최대한 같게 하였다.

둘째, 원본과 최대한 같게 만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해례본의 가치를 최대한 잘 드러내는 것도 복간본의 근본 취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해례본의 원본 이미지를 손상하는 뒷면의 낙서는 지웠다. 뒷면 글자가 보이는 쪽은 모두 41쪽이다. 전체 66쪽 가운데 62%나 되는 뒷 면 글씨가 배접으로 인해, 또는 글자 농도로 인해 앞면으로 배어 나왔다. 앞면 낙서가 심한 정음 4ㄴ면과 정음해례 29ㄴ면도 낙서를 지웠다.

복간본 보다 정밀한
 교예본(복제본)

복간본이 원본 그대로를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원본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원본은 뒷면에 낙서가 있지만 복간본에는 없다. 원본은 뒷면 낙서가 앞면에 스며나와 있지만 복간본은 그또한 지웠다. 그렇다면 원본과 똑같이 만든 것은 엄격히 말하면 ‘복제본’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마 ‘복제’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간송미술관은 ‘교예본’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다.

교예본은 필자도 직접 보았지만 전문가들조차 원본과 구별하기 어렵다. 뒷면 낙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완벽하게 원본과 똑같이 만든 것이다. 당연히 수작업으로 만들어 비용 자체가 수천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간송미술관은 원본을 수장고에 보관하고, 교예본을 전시하여 원본을 꼭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원본에 준해 보여준다.

간송미술관의 교예본(왼쪽)과 가온누리 복간본(2023), 정음해례2ㄴ3ㄱ.

이렇게 ‘모사본→영인본(사진본, 다듬본)→복간본→교예본’ 순으로 해례본의 이본을 살펴봤다.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이냐 차원이 아니라 시대와 펴내는 맥락에 따라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해례본의 내용과 가치를 더 많이 나누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기에 원본 못지 않은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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