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행궁 기와 아닌 초가 가능성 높아
상태바
초정행궁 기와 아닌 초가 가능성 높아
  • 권혁상 기자
  • 승인 2016.01.28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혁연 위원 <세종실록>서 “초수행궁 ‘이엉을 덮었다’” 표현 발견
청주시 기와집 행궁 재현 계획 재검토 필요, 고증작업 공론화 계기

청주시가 초정행궁 조성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행궁이 기와집이 아닌 초가(草家)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근 조혁연 충북문화재연구위원은 <충북일보> 보도를 통해 “<세종실록>에 온양·초수행궁 모두 ‘이엉을 덮었다’고 표현해 초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에따라 당초 기와집을 재현하는 것으로 조성사업을 추진해온 청주시가 사실고증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 청주시의 세종대왕 초정행궁 재현 조감도.

청주시는 오는 2018년까지 국비 등 1백20억원을 투입해 내수읍 초정리 18-3 일대에 세종대왕 행궁을 재현키로 했다. 당초 불에 타 사라진 초정 행궁을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사료가 충분치 않아 온양행궁 등 다른 지역 행궁을 참고해 재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조 위원이 조선시대 문헌 사료를 정밀 검토하는 과정에서 행궁이 초가라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표현을 발견하게 된 것. 조 위원이 보도기사에 인용한 《세종실록》 126권의 세종 31년(1449) 12월 3일(기유) 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고, 괄호 안은 원문이다.

“온양(溫陽)과 초수 행궁(椒水行宮)에서도 너무 지나쳤으나, 모두 이엉[茨]을 덮었을 따름이니, 너는 배천으로 가되 폐단이 나지 말게 하라. 그렇다고 내가 거처할 곳이 너무 좁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溫陽、椒水行宮, 亦爲大過, 然皆蓋茨耳, 爾往白川, 毋令生弊。 且予所寓之處, 亦不可太隘也).”

인용문에 의하면 당시 세종은 △온양과 초수의 두 행궁을 모두 이엉으로 덮었으나 규모가 다소 크고 △따라서 이번 황해도 배천 거둥에는 폐단〔민폐〕가 일지 않도록 하며 △다만 나의 거처는 너무 좁게 하지 말 것 등을 지시했다.《세종실록》 원문 가운데 ‘溫陽、椒水行宮’은 문법상 ‘온양의 초수행궁’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뒤에 ‘모두 이엉을 덮었을 따름이니’(然皆蓋茨耳)라는 복수 표현이 온 것을 감안하면 별개의 2개 행궁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지명 온양은 따스한 온천수가 나오기 때문에 지어진 것으로, 차고 톡 쏘는 용출수에 붙이는 초수와는 분명히 구분되고 있다.

▲ 영괴대기에 실린 ‘온양별궁전도’

온양행궁도 초가에서 기와로(?)

《세종실록》의 다른 기록에도 세종대왕 초정약수 행궁이 초가였던 것으로 짐작케 한다. 세종대왕은 1444년 1월 27일 청주목 초수리에서 초수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당시 내섬시윤 김흔지를 파견해 행궁을 짓도록 했다. 또한 지시한 지 1달여 만인 3월 2일 초수리 행궁에 당도한 것으로 기록됐다. 따라서 조 위원은 “한달이라는 짧은 기간, 그것도 겨울이 한참이던 엄동설한에 초가가 아닌 와가(瓦家, 기와집)를 건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다른 추론으론 4년 뒤인 1448년 3월 28일에는 초수리 주민의 실화로 행궁이 전소된 사건을 제시했다. 당시 세종은 농번기를 감안해 실화범을 1달여만에 속방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때도 순간의 실화로 집이 전소된 것을 감안하면 당시 초정약수 행궁이 초가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고 덧붙였다.

조선시대 행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자료는 없다. 다만 규장각에 소장된 ‘영괴대기 (靈槐臺記)’라는 제목의 책 속에 ‘온양별궁전도’가 남아있다. ‘영괴대기’는 정조가 온양에 왔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그 자취를 1795년(정조 19) 기록한 책이다. ‘영괴대’란 신령스러운 느티나무 옆에 설치한 사대(射臺)라는 뜻으로 영괴대는 현재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동에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온양별궁전도’의 건물이 기와집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에대해 조 위원은 “정조가 사도세자를 추모하면서 그린 그림인데, 세종행궁이 있던 시기보다 훨씬 후대에 제작된 것이다. 또한 세종 이후 많은 조선 임금들이 온양행궁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세종 때는 초가행궁이었다가 이후 기와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대해 강민식 학예연구사는 “세종실록 곳곳에 당시 세종이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인근 지역 관리들의 의례적인 선물도 되돌려보내셨다고 한다. 세종의 이러한 면모가 행궁을 짓는데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엉[茨]을 덮었다거나 한겨울 단기간 건축, 실화로 전소된 사실 등 상당히 객관적인 근거라고 본다. 원형에 대한 공론화의 계기가 마련된 만큼 다시한번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화성 행궁은 무리한 제안

당초 청주시는 초정리 일대에 세종대왕 초정 르네상스 사업을 구상했다. 초정행궁(3620㎡)을 재현하고 한류관(9000㎡)과 치유의 숲(7만㎡)을 조성한다는 게 이 사업의 뼈대였다. 하지만 감사원의 재검토 요구에 따라 초정행궁 조성사업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 추진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지난해 8월 내수읍사무소에서 주민 70여명을 상대로 초정행궁 재현 사업 주민설명회를 열었다. 시는 당초 초정행궁의 원형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이었으나, 행궁터는 물론 행궁도나 행궁의 규모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지 못해 조선 시대 다른 행궁 등을 참고해 재현하는 쪽으로 사업 방향을 정했다. 일부 고건축 관계자는 수원 화성의 행궁을 본보기로 제시해 예산 확대를 염두에 둔 무리한 제안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익명의 지역 향토사학자는 “초정행궁은 세종이 많이 이용하셨고 세조가 한번 찾은 기록이 있다. 따라서 그 규모가 화성 행궁과 비교하긴 힘들다고 본다. 물론, 왕의 거처를 초가로 짓는다는 게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조선의 성군, 세종대왕의 풍모를 감안한다면 더 어울릴 수 있지 않겠나? 왕이 초가에 머물며 문맹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설정이 자연스럽다고 본다”고 말했다.

세종대왕 ‘초정 행궁’서 노인 초청 양로연도 열어

지난 2014년 청주시문화재단은 조혁연 충북문화재전문위원 등과 함께 세종대왕이 초정에 행차해 행궁을 짓게 된 배경, 어가행차의 노선, 당시 초정리 풍경, 초정행궁에서의 활동 내용 등을 연구발표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안질·소갈증·욕창 등으로 고생하자 대신들이 초정약수를 추천했다. 이에 세종은 1444년 2월에 내섬시윤(지금의 비서관) 김흔지를 통해 초정리에 행궁을 짓게 하고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행차했다.

당시 한양에서부터 초정리까지의 거리는 280리였으며 한양~영남대로~죽산~진천~초정의 노선을 5일에 걸쳐 어가 행렬을 통해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종 행차에는 세자(문종), 영흥대군(영웅대군), 안평대군도 동행했다. 세종이 초정리에 행궁을 짓고 머무른 기간은 두 번에 걸쳐 123일간(1차 3월2일부터 5월2일까지, 2차 7월20일부터 9월21일까지)으로 초정 약수를 마시고 몸을 씻는 등 치료했다. 아쉽게도 초정리 행궁은 1448년 방화로 불에 타 없어지면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나 “신동국여지승람”등의 자료에 초정원 옆에 있다고 기록해 초정약수터 주변으로 보고 있다.

123일간 행궁에 머물면서 세종대왕은 한글창제를 마무리 하고 마을 주민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고 노인을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기도 했다. 또한 청주향교에 통감훈의·성리군서·집성소학 등 책 9권도 하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중부지역에 가뭄이 계속되자 “청주목 백성들이 나 때문에 고통받는다”며 집집마다 벼 2섬을 무상으로 전달하도록 했으며 어가 행차 중에 전답이 훼손된 농가에는 쌀과 콩으로 보상하도록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