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온달산성 역사적 실체 밝혀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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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온달산성 역사적 실체 밝혀질까?
  • 윤상훈 기자
  • 승인 2016.05.1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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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도 문화재연구원 5번째 발굴 개시, 신라성인가 고구려성인가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이 고구려장군 온달 이야기가 전해지는‘단양 온달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선다.

단양군 온달산성이 남한 내 고구려 유적의 맏형으로 공인받을 수 있을까? (재)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이 고구려 장군 온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사적 264호 ‘단양 온달산성’에 대한 다섯 번째 발굴조사에 나섰다.

지역 문화계는 이번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올지 초미의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앞선 조사에서 화살촉 말고는 고구려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2011년, 2012년, 2015년 등 네 번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수혈주거지와 집수시설, 토기 조각 등이 발굴됐지만, 이들 유구와 유물은 고구려 이후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 것으로 추정됐다. 학계는 이 때문에 온달산성을 고구려 시대에 축조했다고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통문화대학 이도학 교수는 “성의 다락문(懸門) 구조 출입문과 수구(水口), 성벽의 기단보축 시설, 출토 유물인 굽다리접시(高杯)와 신라토기편, 기왓장을 종합할 때 신라 시기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신라 축조하고 고구려 공격(?)

지난 2011년 신라 축조설을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은 이 교수는 실지 회복을 위해 출정한 고구려 온달장군이 온달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신라가 축조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봤다.

이 교수는 특히 온달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계 화살촉과 관련, 온달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의 소지품일 것으로 설명했다. 출토물 등을 감안하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아단성 아래에서 싸우다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는 온달장군의 전투 정황에도 부합한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신라가 성을 축조하고 수비한 가운데, 고구려가 공격했던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도 온달산성의 입지 조건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 축조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온달산성은 북쪽 남한강변에서 보면 성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남고북저의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온달산성이 남쪽인 신라를 방어하면서 북쪽 고구려의 선박 출입을 관장하는 소임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전면 발굴이 이뤄지지 않는 한 현재로선 어떤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할 것”이라며 전면적인 추가 발굴 필요성을 제기했다.

남고북저 입지는 고구려 축조(?)

온달산성은 영춘면 하리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둘레가 683m이고 지정면적은 2만 6354㎡다. 현재 성벽과 동·남·북의 문 터, 우물터·배수구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영춘의 옛 이름이 을아단(乙阿旦)으로 삼국사기의 온달열전(溫達列傳)에 온달이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온달산성이라 이름 불리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단성’이 온달산성이 아닌 서울 광진구 광장동 소재 ‘아차산성’이라는 견해를 개진하기도 한다.

따라서 도 문화재연구원의 이번 발굴은 온달산성을 둘러싼 논란의 실체를 파악하고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여론이다. 산성 일대에 대한 대대적 발굴과 신중한 검증을 통해 온달산성과 고구려와 관련성을 학술적으로 보다 명료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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