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와 로맨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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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와 로맨스 사이
  • 충청리뷰
  • 승인 2016.11.1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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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영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영화로 말하는 세상
윤정용 영화평론가

▲ Bridget Jones's Baby
감독 샤론 맥과이어
출연 르네 젤위거, 콜린 퍼스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곧 마흔 세 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도 혼자다.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녀는 정말 ‘혼자다’(all by myself).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고(그래서 십년 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결혼도 못해서(안 한 게 아니라) 아이도 없다.

그녀의 인생에 있던 두 남자 중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결혼했다. 그래서 그녀는 큰 결심을 한다. 이제 연애를 끊고 제대로 막 살아보기로. 그녀는 뮤직 페스티벌에서 만난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낸다. 며칠 뒤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 있었던 한 남자를 다시 만나 똑 같이 불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그 뒤 그녀는 ‘기적적으로’ 임신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아빠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두 남자를 다시 만난다. 스토리만 놓고 보면 그녀가 임신하는 과정까지는 ‘막장 드라마’에 가깝고, 애 아빠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두 남자를 다시 만나는 과정은 ‘로맨스’에 가깝다. 그리고 중간 중간 막장 드라마와 로맨스를 왔다 갔다 한다.

그녀의 이름은 브리짓 존스다. 벌써 그녀의 세 번째 이야기다. 앞의 두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 ― 열정과 냉정>(2004)이 주로 그녀의 연애 이야기였다면, 이 번 영화는 그녀가 엄마가 되는 이야기다. 즉 연애가 ‘주’가 아니라 엄마가 되는 과정이 ‘주’고, 연애는 ‘주’에 따라오는 ‘부’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2016)다.

영화의 내용을 반복하면 이렇다. 브리짓(르네 젤위거 분)은 한 때의 남자 대니얼(휴 그랜트 분)의 장례식장에서 한 때의 또 다른 남자 마크(콜린 퍼스 분)와 조우한다. 아내와 함께 온 마크를 보며 그녀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낀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여전히 설렌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앞에서 또 다시 설레발을 치며 망친다. 그 뒤 유아 세례를 하는 자리에서 그를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다. 둘은 처음에는 어색해 했지만 몸이 기억하는 대로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며칠 전에 뮤직 페스티벌에서 멋진 훈남 잭(패트릭 뎀시 분)을 만나 뜨거운 밤을 보냈다. 브리짓은 임신을 하지만 기쁨보다는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아빠가 누구인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두 남자 역시 자신이 애 아빠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때부터 막장드라마와 로맨스를 왔다 갔다 한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에 애 아빠가 누군지 밝혀지지만 말이다.

감독은 영화 곳곳에 웃음과 재미를 심어 놓았다. 조금만 진지해 질 순간이면 브리짓은 어김없이 설레발을 친다. 몸 개그와 함께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수줍어하는 마크까지 개그에 동참하며 웃음을 준다. 예전의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무표정함 혹은 뚱함은 이제 나이와 함께 스러지고, 대신 중후함과 넉넉함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는 무심한 섬세함으로 브리짓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아니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설레게 하고 흐뭇하게 한다.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는 시리즈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영화 내내 따뜻한 웃음을 선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르네 젤위거의 사랑스러움과 콜린 퍼스의 중후함, 그리고 이번에는 패트릭 뎀시의 멋진 매력을 유감없이 볼 수 있다. 바람둥이 휴 그랜트의 한 없이 가엽고 경박스러움을 못 봐서 조금 아쉽지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는 우리로 하여금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잠깐 생각하게끔 한다. 영화 <은교>(2012)에서 이적요는 젊음을 질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닌 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즉 영화 속 이적요는 젊음을 시기하고 부러워한다. 그리고 늙음에 대해 고통스러워한다. 반면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서글픈 일이 아니라 마음에 좀 더 여유가 생기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세월의 흐름을 무겁게 느끼기보다는 가슴 설레고 즐거웠던 예전을 추억하고 회상한다.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를 보면서 많은 영화가 떠올랐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전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출연 배우 때문인지(콜린 퍼스, 엠마 톰슨, 휴 그랜트) 아니면 이야기 내용 때문인지(아버지 찾기) <러브 액츄얼리>(2003)와 <맘마 미아!>(2008) 같은 영화들이 스쳐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는 내내 예전에 보았던 <뮤리엘의 웨딩>(1994)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제는 브리짓이 날씬해지고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에 자꾸 뮤리엘의 모습이 겹쳐졌다.

뚱뚱하고 촌스러운 뮤리엘은 결혼 피로연에서 부케를 받으면서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고 심지어는 도둑으로까지 몰린다. 그녀는 늘 친구들로부터는 왕따를 당하고 아버지로부터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혼’이라고 생각하고 결혼에 목을 맨다. 결혼에 대한 환상으로 웨딩숍에 들어가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 것을 취미 삼기도 한다.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지만 진실함이 결여된 거짓 결혼이기에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친구 론다마저 암으로 다리를 절단하는 상태에 이르자 그녀와의 우정 또한 위태롭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자살하고 아버지는 파산한다. 결국 그녀는 거짓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진정한 사랑과 우정, 삶에 대해 눈뜨며 론다와 함께 고향을 떠난다.

<뮤리엘의 웨딩>에 대해 어떤 영화 평론가는 기분이 우울할 때 이 영화를 보면 조금 위안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그 평론가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우울할 때 뮤리엘의 모습을 보면 ‘나는 최소한 저 정도는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심리적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맥락에서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 말에 공감했던 것 같다.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를 아무 정보 없이 보았다. 그렇다 보니까 악취미일 수도 있겠지만 보는 내내 브리짓이 뮤리엘처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포기하고) 떠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브리짓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그래 너 수고했어. 앞으로 잘 살아.” 하지만 뮤리엘에게도 한 마디 하고 싶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그리고 둘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인생, 그거 누구도 알 수 없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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