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 디자이너와 ‘삶터’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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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디자이너와 ‘삶터’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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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1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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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직언직썰/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그들이 하는 삶터디자인과 우리 디자이너의 새 역할>. 1988년에 썼던 석사논문 제목이다. 공과대학 학위논문이 아니라 무슨 수필 제목 같다며 놀리던 선배가 있었다. 논문 제목이 꼭 ‘무엇에 관한 연구나 고찰’처럼 딱딱해야 하느냐며 반문했더니, 내용을 가장 잘 담아낸 제목이면 되겠다며 수긍해주었다. 에세이처럼 보이는 논문을 기껍게 심사하고 통과시켜준 지도교수님과 심사위원들이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맙다.

‘그들’은 누구고, ‘삶터디자인’은 또 무엇이며, 우리의 ‘새 역할’은 어떤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논문에 담았다. 그들이란 전문가가 아닌 ‘이용자’고 ‘주민’이다. 누군가가 살아갈 곳을 전문가들이 대신해서 만들어주는 것이 <터 디자인>이라면, 거기 살면서 자신의 삶터를 스스로 가꾸는 것이 바로 <삶터 디자인>이다. 전문가들만이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고, 이용자와 주민들도 자신의 삶터를 디자인한다면 그들을 돕는 일 또한 우리 전문가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석사논문을 쓰던 당시 나는 기숙사에서 살았다. 기숙사를 디자인한 사람은 어느 건축가였을 것이다. 그가 디자인한 2인실 방에는 책상과 책장을 비롯해 침대, 의자, 옷장 같은 가구들이 각각 두개씩 주어졌다. 기숙사에 들어와 생활하는 사생들에게 주어진 터(환경)는 똑 같았다. 그런데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방들은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 갔다. 똑같이 주어진 방과 가구들이 이용자의 손에 의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꼼꼼하게 조사하고 기록하였다. 논문을 핑계로 금단의 공간이던 여학생 기숙사까지 맘껏 들어가 볼 수 있어서였을까? 조사하고 논문으로 엮어내는 일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 놀이처럼 신나고 재미있었다.

똑 같이 주어진 ‘터’는 다채로운 모습의 ‘삶터’로 변신했고 계속 진화 중이었다. 양측 벽에 따로 놓인 침대를 붙여 쓰는 경우도 많았다. 좁은 침대를 좀 더 넓게 쓰고, 이불이 흘러내리는 걸 막는데도 더블베드가 유용했나보다. 벽에 붙어있던 옷장들을 입구 쪽으로 옮겨와 방문을 열어도 안이 보이지 않게 막고, 창 쪽을 향해 놓인 책상을 뒤로 돌리거나 서로 마주보게 붙여 쓰는 곳도 많았다. 새로운 가구를 들이거나 자신만의 영역을 표현하기 위해 더한 것들과 바꾼 곳들도 많았다.

법대와 정치학과에 다니는 두 여학생이 살던 방이 그중 압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숙사가 아닌 신혼부부 방처럼 푸근했다. 두 침대를 한쪽 벽에 붙여 더블베드를 만들었고, 책상 둘도 이은 뒤 예쁜 책상보를 덮었다. 새로 들인 스탠드 불빛이 은은했다. 바닥에도 담요를 깔아 온돌방처럼 썼고, 한쪽 벽에는 스무 송이 장미꽃들이 매달려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침대에 기대어 있는 클래식 기타 위로 잔잔히 내렸고, 유리창엔 “Free as the wind”라고 쓴 글씨가 반짝 빛나고 있었다. 물어보니 그해 1년 동안 방 배치를 일곱 번 바꿔 지금에 이르렀고, 앞으로 실행해 보고 싶은 계획이 두 가지쯤 더 있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삶터디자이너들이었다.

전문가들만이 디자이너가 아니다. 우리 주민들, 시민들, 누구나 다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이 사람들이 살아갈 터를 만들어주는 <터 디자이너>라면, 우리 주민들, 시민들은 주어진 터를 내 삶에 맞도록 내 손으로 바꾸는 <삶터 디자이너>들이다. 전문가들의 <터 디자인>은 건물의 준공과 함께 끝이 나지만, 주민들의 <삶터 디자인>은 입주와 함께 시작되어 끊임없이 지속된다.

요즘 전국 방방곡곡에 불고 있는 마을공동체와 마을 만들기의 바람도 다르지 않다. 전문가들의 <터 만들기>를 넘어 주민과 시민들을 <삶터 가꾸기>로 초대하는 <삶터 디자인> 운동 아닐까? 내 방부터 내 집까지 내 손으로 바꾸고, 우리 마을과 우리 도시와 우리나라까지 내 손으로 바꾸어가는 <삶터 디자이너>가 되어보면 어떨까? 그대, 디자이너 선생님.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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