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가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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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가 돌아온다
  • 충청리뷰
  • 승인 2018.01.2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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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맞은 권태응 시인, 그리고 <감자꽃>
이 안 시인〈동시마중〉편집위원

이오덕은 그이를 가리켜 “동요를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동요만을 쓴 사람”이라 했고, 신경림은 “헐벗은 아이들의 가슴에 별을 심은 시인”이라고 했다. 평론가 유종호는 그이의 작품 세계를 “티 없는 노래”로, 이오덕은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로 명명했다. 1999년 보리출판사에서 펴낸 <겨레아동문학선집>(겨레아동문학연구회 엮음) 9권과 10권은 동요·동시 편인데, 1920년대에서 한국전쟁기까지 30여 년 동안 활동한 시인 가운데 77인의 작품 177편을 엄선하여 수록하고 있다.

가장 많은 작품이 수록된 시인은 정지용으로 14편, 그 다음이 이원수, 윤복진, 윤석중으로 각각 10편, 윤동주는 7편, 박목월은 5편이다. 그이의 작품은 10편. 동요·동시사에서 차지하는 그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이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1997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십여 년의 어설픈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이 아닌 충주로 내려온 이듬해 봄 어느 날이었다. 충주 KBS 공개홀에서 그이를 기리는 동요제라는 걸 하는 모양이었다.

멋도 모르고 찾아간 그 자리에서 충주고 출신의 신경림, 유종호 두 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특히 유종호 선생의 강연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왔다. 선생의 말씀이 특별했다기보다 막힘없이 외워주시는 그이의 동요라는 것이 그러했다. 그전까지 나는 동요나 동시라는 것을 시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 거들떠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그날, 유종호 선생이 외워주시는 그이의 작품 덕분에 나는 난생처음 동시란 것과 만나게 되었다.

그이의 ‘북쪽 동무들’을 보자. “북쪽 동무들아/ 어찌 지내니?/ 겨울도 한 발 먼저/ 찾아왔겠지?// 먹고 입는 걱정들은/ 하지 않니?/ 즐겁게 공부하고/ 잘들 노니?// 너희들도 우리가/ 궁금할 테지./ 삼팔선 그놈 땜에/ 갑갑하구나.”

분단, 또는 통일의 문제를 이렇듯 쉬운 말로, 감정의 격앙이나 너저분한 감상 없이, 그러나 매우 강력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쓴 작품은 아직까지도 흔치 않다. 그것도 시가 아닌 동요로,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적실히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적 대립에 갇히기는커녕 이를 말끔히 걷어낸 시선이 아니고서는 결코 부를 수 없는 노래다.

권태응 시인의 대표작 ‘감자꽃’

‘고추잠자리’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연약한 생명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다. “혼자서 떠 헤매는/ 고추잠자리,/ 어디서 서리 찬 밤/ 잠을 잤느냐?// 빨갛게 익어 버린/ 구기자 열매,/ 한 개만 따 먹고서/ 동무 찾아라.”

차갑고 파란 가을하늘과 빨간 고추잠자리의 색채 대비가 선명하고, 고추잠자리와 구기자 열매의 빨강은 서로를 강화하면서 더욱 붉다. 당시로선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인 폐결핵 3기 환자의 눈에, 죽음의 시간(“서리 찬 밤”)이 다가오는 고추잠자리의 처지가 자기와 달리 보였을 리 없다. 그러기에 환자에게 먹이듯이, 흔히는 먹지 않는 구기자 열매를 ‘한 개만’이라도 고추잠자리에게 따 먹이고 싶었으리라.

감자꽃권태응 지음창비 펴냄

나는 그이의 작품 중 ‘북쪽 동무들’, ‘고추잠자리’, ‘땅감나무’, ‘산샘물’, ‘오리’, ‘또랑물’, ‘아버지 산소’, ‘보리밭 매는 사람’ 등을 특별히 아끼고 좋아하지만, 대표작을 한 편만 고르라면 언제든 ‘감자꽃’이 꼭 되어야만 한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모두 서른여섯 글자, 1연과 2연이 정확한 대구로 짜였다. 한하운의 ‘개구리’와 함께 언어 경제의 정점을 매우 음악적으로 실현한 작품이다.

그이의 삶은 윤동주와 겹친다. 문학적 성취도 높으려니와 삶의 흠결도 없다. 국가는 사후 54년 만인 2005년 8월 15일 그이를 독립유공자로 표창했다.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동주는 조폐공사에서 기념메달까지 만들어 시판하는 등 추모 열기가 뜨거웠지만, 그이는 아직 발견되지도 않은 원석처럼 땅속에 묻혀 있다.

올해가 그이의 탄생 100주년이다. 서른넷 짧은 생애 동안 일본제국주의와 병마와 전쟁과 맞서며 그이가 남긴 작품은 동요 370여 편을 비롯하여, 시와 시조, 수필, 희곡, 단편소설 등 여러 갈래에 걸쳐 적지 않다. 올가을 출판사 창비에서 그이의 전집이 나온다. 탄생 100주년, 사후 67년 만에 그이, <감자꽃>(창비 1995)의 권태응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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