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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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연대
  • 충청리뷰
  • 승인 2018.09.1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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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동 균 신부 대한성공회 청주산남교회

살아가면서 고통을 피해본 기억은 얼마나 되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늘 언제나 고통은 잊을만하면 내 앞에 나타났다. 나의 개인사가 이러할진대 세계사에서 인류의 고통은 한번도 멈춘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고통은 진화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끝없는 고통은 아무 의미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기쁘고 즐거웠던 시간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 기쁨과 희락도 고통의 결과이며 고통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고통을 배경으로 연대하는 관계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다.

나의 지도교수님은 오랫동안 투석을 하시면서도 신장이식을 거부하셨던 신학자이자 윤리학자이시다. 요 며칠 전 너무 오래 신장투석을 하셔서 심장판막이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심장수술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고민 중에 그냥 곡기를 끊고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주 맑은 눈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금은 어눌하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모습이 나에게 진하디 진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분의 중년 이후의 삶을 지켜보고 그분께 학문을 배운 나는 그 고통이 그분의 삶의 배경색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이제 그 고통을 끝내고 싶어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수술을 선택하셨다.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노구의 몸에 심장수술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지만 또 다른 고통이 연장될 거라는 것은 틀림없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그러면서도 나도 그분도 그 수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주쳤다. 고통은 끝이 없다.

자본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현대세계는 쾌락을 동력으로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무자비한 고통의 생산을 통해 자본의 이익을 추구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들의 아픔이 그렇고 용산 참사에서 죽어간 철거민들, 쌍용자동차의 해고노동자들은 자본이 남겨놓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후쿠시마의 핵발전소가 용융(멜트다운)되면서 피폭된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자연은 아주 맑은 하늘에서 오늘도 그 피폭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 피폭의 고통은 아마도 2만5천년이 지나야 해소된다고? 그것은 해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통이며 지옥이다. 세월호의 참상을 지켜본 국민들은 그 고통을 내재화하면서 결국은 하나의 커다란 분노를 만들어냈다.

촛불로 타오른 그 결집과 연대의 힘 밑바탕에는 세월호를 지켜보았던 국민들의 끅끅하는 고통의 숨결이 흐르고 있었다. 부모와 가족들의 원통함이야 더 이상 말로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의 끝없는 절규를 감싸안으며 그들을 지켜준 국민들의 힘은, 그 날 온국민이 속으로 꾹꾹 눌러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던 고통의 숨결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고통의 숨결로 이어져 있다. 예멘에서 쫓겨나 제주에 도착한 피난민 몇 백명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몰고 있는 이 나라의 옹졸함도 보다 커다랗게 흐르고 있는 인류 연대의 숨결에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어금니 아빠’로 불렸던 살인마의 감형소식을 듣고 차갑고 젖은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는 희생자 아빠의 고통은 그 인류의 커다란 연대가 감싸줄 것이다. 오늘도 나의 고통보다 훨씬 더 커다란 고통의 뉴스가 온 세계에, 온나라에 전해지지만 그를 이겨내려는 연대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고통이 심해질지라도 고통받는 자들의 연대는 더욱 더 강해질 것이다. 그 고통이 계속되더라도, 더 심해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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