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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없는 날에도 이름 불러주는 사랑윤제림의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이 안 시인〈동시마중〉편집위원

시인은 잘 받아쓰는 사람이다.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사물이 하는 이야기를 보고 듣는 훈련이 시 쓰기의 첫걸음이다. 샛노랗고 커다란 호박꽃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자동차 아래 들어가 비를 피하는 길고양이는 어떤 마음일까. 집 안 창가에 놓인 화분은 어떤 마음으로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을까. 윤제림 시인은 최근 나온 첫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문학동네 2018)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제 글쓰기는 대부분 받아쓰기입니다. 귀가 조금 큰 편이라서 그럴까요. 남의 소리를 잘 듣습니다. 잘 들어 주니까, 바위와 나무가 말을 걸어옵니다. 꽃과 구름이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귀신이 와서 수다를 떱니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고민을 늘어놓습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엄마가 와서 하느님 흉을 봅니다.”


생각해 본다. 바위는 무슨 말을 할까? 나무는? 꽃과 구름의 비밀은 무엇일까? 귀신의 수다는 무서우면서도 놀라울 것같지 않은가? 강아지와 고양이의 고민은 어딘지 사람과 같이 사는 일의 어려움과 닿아 있을 것 같다. 무소부재하신 사랑의 하느님은 대체 어떤 흉을 듣는 걸까? 그것이 무엇이든 놀라운 일이 될 것이 틀림없다. 윤제림 시인이 받아 적은 꿈은 이렇다.


“모두 무릎을 칠 만큼 멋진 시를 지었다// 이거 정말 네가 쓴 거야?/ 동무들이 놀라서 물을 것이다/ 이거 정말 네가 썼니?/ 선생님께서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물으실 것이다/ 교장 선생님까지 달려오셔서/ 물으실 것이다// 이거 얼른 꿈 밖에 가져다가/ 세상 놀라게 해야겠다// 그러나 꿈은 꿈이었다/ 깨고 나니, 한 줄도 생각나지 않았다” (「꿈에」 전문)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윤제림 지음 문학동네 펴냄


이 작품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꿈의 허망함을 말하는 것이지만, 대상의 말을 제대로 받아 적는 것의 어려움, 또는 불가능을 말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말과 대상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이름이 대상을 빗나가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우리는 당혹스러움과 맞닥뜨리게 된다.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한 골짜기에 피어 있는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이/ 한 소년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소년이 양지꽃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내가 좋아하는/ 노랑제비꽃!”// 양지꽃은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노랑제비꽃도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누가 더 섭섭했을까」 전문)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은 피는 계절이 비슷하고, 꽃 색깔이 비슷하고, 꽃 크기도 비슷하다. 게다가 같은 골짜기에 피어서 한 소년을 좋아하는 것까지 닮았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게 그것으로 보일 법하지만,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섭섭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나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일
다음 작품은 꽃이 없는 날에도, 잎이 없는 날에도, 열매가 없는 날에도 그 나무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일이 참된 앎이고 사랑이라 말한다.


“나무들은 일 년에 두 번 이름표를 답니다// 한 번은 꽃이 필 때// 사람들 모두 알은체하면서 꽃가지 사이로/ 사진 한 장씩들 찍고 가지만/ 나무 이름은 곧 잊어버립니다// 또 한 번은 열매를 매달 때// 사람들 모두 알은체하면서 열매 하나씩/ 따 가면서 즐거워하지만/ 나무 이름은 곧 잊어버립니다// 나무들은 일 년에 두 번 이름표를 답니다”(「이름표」 전문)


윤제림 시인은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랐다. 『삼천리호 자전거』 『사랑을 놓치다』 『그는 걸어서 온다』 『새의 얼굴』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냈지만 동시집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섯 번째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에 실린 「재춘이 엄마」 「공군소령 김진평」 「가정식 백반」 「관광버스가 보이는 풍경」 「외할머니는 슬며시」 등은 동시로 읽어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윤제림 시인의 시가 그런 것처럼, 동시도 읽는 재미를 준다. 가벼운 재미가 아니라, 무겁지 않게 깊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고 즐기기에 좋은 동시집이다. 한 편 더 소개한다.


“상혁이 엄마/ 상혁이 아빠/ 상혁이 고모/ 상혁이 이모/ 상혁이 삼촌/ 상혁이 할아버지/ 상혁이 담임 선생님// 다 내가 만들었다// 나?/ 상혁이.” (「내가 만든 어른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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