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고독 속에서 진정한 해방과 희망 꿈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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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고독 속에서 진정한 해방과 희망 꿈 꿔
  • 충청리뷰
  • 승인 2018.12.1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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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후밀 흐라발 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

김대선
청주독서모임 ‘질문하는 책들’ 운영자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며 살아가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날마다 수없이 쏟아져 내리는 폐지를 압축하여 파괴하기 전에 겨우 구해낸 책 일부를 골라 읽으며 지식과 교양을 축적해 왔다. 그러다 결국 자기 생각과 책에서 읽은 내용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지었다. 책 내용의 깊이와 넓이가 무궁무진하여 읽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본문이 겨우 백삼십 쪽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인간과 세상 모두를 겨냥한 이 소설은 밀도가 높고 이야기가 강렬하여 단숨에 쉽게 읽고 넘기기 어렵다.

흐라발은 밀란 쿤데라와 함께 현대 체코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그와 쿤데라의 삶에는 큰 차이가 있다. 쿤데라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에 망명해서 살아갔다면, 그는 정부의 검열과 감시로 탄압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체코에 남아서 고된 삶을 버텨냈다. 저자의 자전적인 경험이 포함된 이 소설 속에는 그의 인생에 새겨진 고행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주인공 한탸는 때때로 악몽과도 같은 상상에 시달린다. 그의 주변을 빙 둘러싼 거대한 책 더미가 어느 순간 쏟아져 내려서 자신을 납작하게 깔아뭉개거나, 우연히 압축기로 빨려들어 죽어간 쥐들의 동료가 자신을 공격하여 복수하는 상상이다. 늘 취한 채로 몽롱하게 살아가는 그의 고뇌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수없이 주절거리는 주정 같은 그의 말을 얼마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파악하기 어렵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문학동네 펴냄

한탸는 잔혹하게 억눌린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수년 뒤에 맞이할 멋진 은퇴를 고대한다. 그는 본의 아니게 이제까지 수행해 왔던 무분별한 파괴 행위를 더 지속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은퇴 후에는 압축기를 사들여서 집에 갖다놓고, 하루에 한 꾸러미씩만 세심하게 골라 꾸리고자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 꾸러미는 그의 지혜의 정수가 담긴 부끄럽지 않은 최상의 예술 작품이 된다.

연민과 고독으로 얼룩진 삶
하지만 그의 기대는 뜻밖의 벽에 가로막히며 잔혹하게 무산된다. 어느 날 근처에 새로운 폐지 압축 작업장이 들어섰는데, 그곳의 거대한 압축 기계는 한탸의 그것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폐지를 쉽고 빠르게 압축하여 파괴하는 무서운 능력을 지녔다. 그에게 있어서 이 새로운 압축 기계는 끔찍한 괴물처럼 보인다. 이 거침없는 괴물은 인간의 본성과 지혜를 얼마나 사정없이 짓눌러 버릴 것인가.

환멸과 절망에 빠진 그는 먼 옛날에 가까스로 누릴 수 있었던 작은 행복들을 추억한다. 그에게 주어졌던 행복은 너무나도 소박하고, 그마저도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만 지속된다. 그의 주변은 연민으로 가득하며, 고독의 연속이다. 쉽사리 항거할 수 없는 세상의 거대한 힘과 무분별한 변화의 폭력 앞에서 개인의 소망과 정성이란 너무나도 보잘것없이 그려진다. 세상은, 인간의 삶이란 본래 다 그런 것일까.

오래전 한때 한탸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웠던 사랑 이야기는 무척 인상적이다. 하늘에 커다란 연을 날리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었던 어린 집시 여인의 이야기는 유난히 애달프다. 한탸는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이름을 알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듯하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다시 만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과거의 울분과 슬픔과 연민과 고독이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서 다시 한탸 앞에 선다.

철학과 역사에 관한 지식은 이 책의 읽기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역사를 아는 것이 문학의 이해에 얼마나 중요한지의 여부는 요즘의 내 주된 관심사다. 나는 아직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더 깊이 알고 싶은 부분이 꽤 많다.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이 책은 우리 독서모임의 올해 마지막 선정도서가 되었다. 여럿이 함께 읽고 모여서 대화하면 훨씬 다채로운 이야기가 오갈 것이니, 이번에는 한탸의 고독과 연민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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