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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죽지마라
한 덕 현 발행인

고 김용균 씨의 유품이 또 한번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스물 네 살, 생전의 해맑은 모습과 석탄가루가 뒤범벅된 유품들이 자꾸 오버랩되면서 한동안 멍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컵라면과 과자 한 봉지, 얼룩이 잔뜩 묻은 작업 수첩...이 것들의 주인은 머리가 없어진 채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졌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진다.


2년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 때도 그랬다. 시간이 없어 채 뜯지도 못했다는 컵라면이 그토록 서럽게 다가올 수가 없다.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배고팠을까’를 되뇌이며 그들을 기억에서 되살리려 애쓰지만 나는 하릴없게도 그 죽음들의 반대 저 편에서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너무나 태연하게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같은 하늘 아래, 삶이 달라도 이토록 처절하게 달라도 되는 지를 되물으면서 말이다.


이런 사고가 벌어질 때마다 어느덧 우리에게는 느닷없이 엄습하는 트라우마가 하나 있다. 세월호 참사다. 어린 학생 300여명의 희생은 참 길게도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떼지어가는 학생들만 봐도 세월호가 떠올라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사고의 충격이 크면 클수록 기억은 더 실체적으로 잔인(!)해진다. 갑작스런 죽음이라는 게 이렇다. 살아남은 자가 감내해야 할 고통은 그 기억으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살을 붙여가게 마련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사찰 의혹으로 수사를 받다가 자살한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장례식에선 아들의 추모사가 사람들을 울렸다. “아버지의 큰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선택이 아버지의 명예가 지켜지는 것이라면 그 명예를 평생 지니고 새기며 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가장의 죽음이 앞으로 가족, 특히 이 아들에게 어떻게 다가올 지를 생각하면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이 전 사령관이 누구보다도 강직한 참군인 이었음이 뒤늦게 회자되면서 안타까움은 더 커지는 것이다.


유시민은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이렇듯 준비된 죽음이 아니고 자살 등 포기하는 죽음이나 사고로 인한 돌연한 죽음이 주변에 넘쳐난다. 그리고 그 갑작스런 죽음에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반드시 수반된다. 모든 사람은 결국엔 다 죽는다. 나도 언젠간 죽는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삶은 그러한 죽음이라는 숙명과 나란히 인식될 때만이 제대로된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야만 그 자체다. 사(死)의 찬미라는 것도 준비된 죽음에 국한되지 결코 좌절과 패배의식에 근거하지는 않는다. 물론 자살이라고 해서 그저 충동이나 분노의 발로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다. 거기엔 이 것들을 넘어서는 격통과 고뇌가 있을 것이다.


우울증이나 상실감, 무력감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당사자들은 천당과 지옥을 수없이 왕복하다가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삶이 죽음보다 언제나 좋고 명예롭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기에 또 다른 삶을 위한 실존적 선택으로 자살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죽음이 모든 걸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엄청난 고통속에서도 우리는 아주 작은 데서 희망을 찾는다. 옆에 마음이 통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위로가 된다. 그 누구로부터 격려의 말 한 마디만 들어도 힘을 얻게 된다.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한없는 감동을 받는다. 부부가 평생을 같이 살아도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고 또 말 한마디에 큰 상처를 입는다. 때문에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지’라는 말은 백번이고도 맞는다. 어쨌든 순간의 고통은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게 이성이다.


그러니 아무리 명예로운 죽음도 사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이 평범한 진리를 나는 가끔 지인들의 상가에서 절감하곤 한다. 한 번은 지역사회에 명망있던 인사의 본인 상에 문상갔다가 크게 황당해 한 적이 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턱이 닳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면 발길이 끊긴다는 속설을 실제 확인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이 큰 공간에 빈소를 차려놓고 여러 준비를 했다가 막상 조문객이 너무 없게 되자 곤혹스러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살아 있어야 사람들이 알아주지 죽으면 그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세상의 어떠한 죽음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시나브로 잊혀지는 이치와 똑같다.


나이가 들면서 휴대전화 부고문자에 본인 상을 알리는 내용이 빈번해졌지만 참 희한하게도 날이 갈수록 더 덤덤해진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보다 못하다는 이기주의가 어느덧 죽음에 대해서도 체화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죽어봤자 자기만 손해 아닌가.


언젠간 죽어야할 운명이라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해졌다. 지금 오늘,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하고 또 최선을 다해 삶을 즐기는 것이다. 요절로써 생을 마감하며 “미래는 현재의 연속일 뿐이다”고 말한 전혜린의 뒤늦은 깨우침은 맞다. 아모르 파티, 카르페 디엠! 그러니 제발 죽지마라, 그렇듯 허망하게 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물 네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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