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품어준 송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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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품어준 송평리
  • 충청리뷰
  • 승인 2019.04.0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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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아이 넷을 데리고 괴산으로 이주
2014년 괴산으로 이주해 2년간 살았던 집

2011년 여름 넷 째 아이가 6개월이 되었을 때 남편은 서울 영등포에 있는 연구소에서 충북 진천 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아이들이 어려 친정엄마 곁을 떠날 수 없어서 우리는 상상도 못했던 주말부부가 되었다. 남편은 아이를 보러 수요일에 올라오고, 금요일도 일찍 귀가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혼자서 초등 1학년 입학한 첫째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 셋째, 그리고 갓난 막내까지 남편 없이 아이들과 지내는 날들이 낯설고 힘겨웠다.

2012년 가을, 괴산에 귀촌한 친구가 놀러오라고 했을 때, 우리는 친구가 있는 괴산이라면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괴산이면 진천이든 음성이든 출근이 가능하니까. 그리고 2013년 가을 한 번 더 괴산에 다녀간 후, 2014년 봄 친구가 소개해준 집을 보러 괴산에 내려왔을 때는 미선나무 축제가 있던 봄날이었다. 아이 넷을 다 데리고 음성에 있는 아빠의 사무실도 구경할 겸 다같이 여행짐을 싸들고 내려왔다. 그렇게 하얗고 자그마한 2층집을 만났다.

집주인의 배려로 터를 잡다
우리는 집주인 부부를 만나서는 금방 아차! 싶었다. 매매로 나온 집을 전세로 돌려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이가 넷인 집에 누가 전세를 주겠나. 그 집을 2년 전세 살아보고 매매하겠다고 말했지만, 꼭 그렇게 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리고 작고 아담해서 예쁘지만 2층에 방 2개, 1층에 부엌 거실 뿐이어서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 작은 집이었다. 뒤로 돌아앉은 데크와 너른 논의 전경은 매우 맘에 들었지만 우리 집이 아닌가보다 생각했다.

초등 4학년과 2학년 첫째·둘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뒷산을 기어오르고, 일곱 살과 네 살 셋째·넷째는 물댄 논을 바라보며 조잘거렸다. 괴산에서 <어린이 문화예술 사과>라는 문화예술교육단체를 운영했던 집주인 부부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흔쾌히 아이가 넷인데도(!) 전세를 줄 테니 한번 살아보라고 했다. 목조주택이 얼마나 쾌적한지, 아파트와 다르게 습도 조절이 얼마나 잘 되는지, 논을 바라보며 살아보고 집을 매매해도 좋다고 했다.

2015년 어린이날 행사 때 네 명의 아이들

남편은 집이 좁아서 망설였지만, 집이 맘에 들었던 나는 집주인에게 창고를 지어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번에도 흔쾌히 좋다는 대답. 공사를 하고 있을 때 보니, 창고뿐 아니라 부엌까지 대공사였다. 아들 셋 딸 하나라 방 두 개는 좁다고 부엌을 방으로 만들고, 논 쪽으로 부엌을 새로 만들어 준 것이다. 집주인 부부의 호의 덕에 우리 여섯 식구는 드디어 2014년 4월 괴산으로 이사했다.

낮은 산을 뒤로 하고 너른 논을 앞에 펼치고 있는 송평리. 우리는 은행정마을에서 살짝 돌아가 있는 도란말 주민이 되었다. 동갑내기 구순 할머니 세분이 사이좋게 천천히 다니시며 늘 웃어주시는, 살기 좋은 장수 마을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마을에 아이 넷을 데리고 이사를 온 후, 우리는 마을회관에서 마을분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고기와 떡을 주문하고 술과 과일을 사고, 회관 부녀회 분들이 밥과 김치를 준비해주셨다.

작은 땅 사서 우리 집도 지어
마을분들은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아이를 많이 낳았냐고 기특하다고 하셨고, 공무원이라니 반갑다고 하셨고, 마을회관에서 식사를 내고 인사를 하니 고맙다고 하셨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 하나가 큰 아이와 4학년 동갑, 마을에서 제일 젊은 부녀회장 언니네 늦둥이가 둘째와 2학년 동갑이었다. 집에서 2km 남짓 떨어진 문광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마침 가장 먼저 전화해본 괴산어린이집에 자리가 있어 일곱 살과 네 살 셋째·넷째는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다. 아침에 학교 버스와 어린이집 버스가 은행정마을회관 앞으로 오고, 오후 방과후 수업까지 다 마친 후 4시쯤 다시 버스로 귀가했다.

할머니들께서는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리니 좋다고 하시며, 아이들이 어쩜 이리 인사를 잘 하냐고 기특해하셨다. 매일매일 집 데크에 초코파이, 쪽파, 옥수수, 고추 같은 것들이 놓여져 있었다. 어르신들은 아이들이 지나가면 차를 세우고 사탕이라도 하나씩 쥐어주셨다. 아이들과 산책하다가 만나면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관심을 가져주셨다.

괴산 송평리 도란말의 할머니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개울에 가서 통발을 놓고 왔다. 마을을 뛰어다녔고, 논에 들어가 미꾸라지를 잡으며 흙투성이가 되어 놀았다. 해가 뜨고 달이 뜨는 방향을 알고, 콩 털 때를 알았다. 날이 더워지면 개울에서, 날이 추워지면 흙을 만지며 놀았다. 아이들은 ‘문화학교 숲’에서 하는 전래놀이 수업을 다녔고, 여러 가지 문화행사를 함께 하며 각자 괴산에 적응해갔다.

우리는 그 집에서 2년을 살고, 옆의 작은 땅을 사서 우리 집을 지었다. 아이들에게 각자 방을 주고, 창고 위에 공간을 내어 내 서재도 만들었다. (우리집이었던 작은 집은 내 가까운 후배가 사서 주말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학생이 된 첫째와 둘째는 이제 많이 컸다고 이전처럼 바깥에서 많은 시간을 뛰어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마을 송평리에서 우리 부부가 늙어가고, 내 아이들은 커가면서 고향을 알게 될 것이다.

원 혜 진
‘문화공간 그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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