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홍진' 충북서 기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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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홍진' 충북서 기려야
  • 김천수 기자
  • 승인 2019.04.1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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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정원 수장 모두 역임한 통일의 대부

 

지난해 8월, 국가보훈처 충북남부보훈지청이 홍진 선생을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발표한 포스터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령을 지낸 만오(晩悟) 홍진(洪震) 선생을 공식적으로 기리는 자치단체가 없다. 그를 충북에서 기려야 한다는 여론이다.

그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독보적인 여러 진기록을 갖고 있으며 좌우를 아우르는 진정한 ‘통일독립운동’의 대부였다.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내에서 각기 추구하는 노선의 차이로 겪는 혼란 속에서도 그는 균형판 역할을 하며 좌우 진영의 통일세력을 만들고자 역경을 헤쳐 나간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홍진은 임시정부 26년 동안 국무령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모두 지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3번의 의장을 지냈고 마지막 의장으로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귀국했다.

충북학연구소가 발간한 ‘2010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9장에 홍진이 실려있다. ‘한성정부를 수립한 만오 홍진’이란 제목으로 단국대 한시준 교수가 집필한 이 글은 48쪽에 달할 만큼 그의 활약상은 크다. 충북학연구소 관계자는 “이 책자 발간 이전쯤 홍진 선생의 유족 한 사람이 사진 등 유품 일부를 들고 왔었다”면서 “그 자료가 책자 내용에 포함됐다”고 말했다.

홍진 선생에 대해서는 이 기록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충북 영동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의 본래 이름은 홍면희(洪冕憙)이다.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본적이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로 나온다. 일제 정보자료에는 청주군 가덕면 인차리가 그의 본적이라고 기록돼 있다. 홍진의 부모가 영동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가보훈처의 공훈기록에도 영동 출신으로 나온다.

지난해 충북남부보훈지청은 ‘8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홍진 선생’을 선정하고 보도자료를 통해 홍보했다. 이시종 충북지사도 매년 3.1운동 기념행사 인사말 등에서 홍진을 충북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충북도에는 그를 기리는 공식적인 움직임이 없다. 영동군 또한 마찬가지다. 영동군은 홍진에 대한 자료 등을 묻자 보훈지청 연락처를 알려줄 뿐이다. 3.1운동 관련 논의가 활발한 충주지역 또한 홍진 선생에 대한 자료는 없다. 충주지역에 홍진의 자료를 물은 건 그가 충주검찰 검사로 1년 6개월간 활동했기 때문이다.

다만 충북도는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즈음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흉상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대상 인물은 이승만, 박은식, 이상룡, 홍진, 김구, 이동녕, 송병조, 양기탁 등 8명으로 대통령 및 국무령을 지낸 인물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을 지내다가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됐고 이후 국무령제로 변경됐다.

이용철 충북대 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홍진은 1906년 시험을 통해 검사가 된 뒤 그해 12월 충주에 소재한 충청북도재판소에 부임했다. 1908년 5월 사직할 당시의 이유는 죄수 석방에 착오가 많다는 것이었다. 의병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이후 홍진은 1909년 7월부터 평양에서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조직적인 운동을 이끌고자 이규갑 등과 정부 수립 작업에 착수했다. 3월 17일 검사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기독교와 유교계 인물들과 만나 정부 이름을 한성정부로 확정했고, 4월 2일에는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대회를 개최해 한성정부의 수립을 결정했다. 홍진은 한성정부 수립을 정식으로 공포하기에 앞서 한남수를 상하이에 보내 알아보게 하고, 자신도 4월 15일 이규갑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후 국내에서는 4월 23일 한성정부의 수립이 공포됐다.

국무령·의장 모두 지낸 유일 인물
그는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 대표 의원 자격으로 활동했다. 1919년 4월 30일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고 7월에는 법제위원장에 임명돼 활동했다. 이후 태평양회의 각국 대표에게 독립청원을 발송하는 등 활동을 벌였다. 1921년 5월 제3대 의정원 의장에 뽑혔다. 1924년부터 2년간 광소성 진강에 은거하던 그를 임시정부는 1926년 7월 7일 혼란한 정부를 수습하기 위해 국무령에 추대했다. 홍진 국무령의 주도하에 개정헌법이 발표됐다. 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의 진작, 전민족대정당의 창당, 피압박 민족과 연맹을 체결해 우의와 국교를 증진한다는 내용이다.

그해 12월에는 국무령을 내려놓고 독립운동 단체 간 계속된 분규를 막고자 1927년부터 한국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해 집행위원을 맡았다. 그는 동북만주에 파견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무장항일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이후에도 한국독립당 재건에 합류했다. 1939년 10월에는 국무위원 내무장으로 임명돼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에 힘썼다. 1942년 10월에는 국무위원회 고문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겸직하며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를 이끌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귀국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찬반 논란 속에 빠져들게 됐다. 그는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서 합작된 과도정권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심장천식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끝내 1946년 9월 9일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명동성당에서 김구 선생의 집례로 장례미사가 올려졌고 시신은 인천 관교동 선영에 안장됐다가 1984년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묘비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묘비 단에는 그가 남긴 “청년 동포여 병든 나라 고치는 병원의 일꾼이 되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지난 2일부터 오는 10월 27일까지 수장고에 있던 홍진의 묘비를 박물관 2층에 있는 작은전시실로 옮겨 전시 중에 있다. 지난해 국회는 국회도서관에 그의 흉상을 세웠다.

충북학연구소 관계자는 “충북의 현실이 이렇다”는 말로 충북지역에서의 홍진 선생에 대한 기림운동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충북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시급한 상황이다.
정부는 1962년 그의 업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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