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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발전소, 한국사회, 그리고 민주주의
신 동 혁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본지는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과 함께 6월부터 매주 ‘지구를 살리자’라는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어렵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동참을 원하시는 분들은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홈페이지(www.cjcb.ekfem.or.kr)나 페이스북에서 ‘지구를_살리는_시민실천_캠페인’,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을 검색하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전 도입은군사독재소수 전문가집단의 일방적 결정

에너지와 자원은 사회 성격과 기술 수준에 따라 획득 양식, 소비 양태가 다릅니다. 그런데 사회발전의 핵심을 기술이라고 여기고, 기술을 도입·습득하려고 사회적 노력을 다합니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기술은 그 사회가 발전해온 역사와 무관’하며, ‘가치중립적인 도구’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도 결국 그 사회 안에서 사회구성원인 시민과 그들의 의사결정구조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라 이름은 같은 ‘과학기술’로 불리지만, 그 내용과 작동방식은 그 사회 구조, 성격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의 원전은 군사독재정권이 경제성장에 따른 전력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입을 결정하였고, 이후 안보를 위해 핵개발 논의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원전의 도입결정은 국회나 사회적 논의를 통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정권과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 의해 독점되었고 일방적으로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양상이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것도 아닙니다. 원자폭탄의 개발과 이후 ‘핵의 평화적 이용’으로 탄생한 원전 전환 과정에서도 기술의 속성과 사회의 관계 양상이 잘 드러납니다. 전쟁의 종식,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전체나 국가를 위한 결정이라는 국가주의의 폭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출발부터 보였던 국가주의적 폭력성과 폐쇄성은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원전 기술체계는 너무 거대해서 한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속성은 이미 기술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술의 특성과 사회구조성격이 일방적이지 않고 이렇게 서로 얽혀 있습니다.


시민들의 참여가 배제된 결정
그런 원전의 기술적 특성에다 도입 당시 우리사회의 비민주적인 조건이 결합하여 1987년 이전 원전에 대한 것은 관련 전문가와 국가에게만 공개되었고, 시민들은 접근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니 시민들이 원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 ‘핵발전국대열’에 올라 ‘과학한국’을 자랑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원전에 대한 좋은 ‘이미지’만 갖고 있던 시민사회에게 원전의 안전성과 위험성에 대해 접근이 허용된 것은 1997년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설치된 이후부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전에 대한 민주적 관리와 통제까지는 시민사회의 성숙, 민주주의의 더 많은 발전과 다른 영역으로의 확산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까지 원전은 주로 지역차원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2016년에 발생한 경주 지진으로 원전은 지역문제에서 생명과 안전에 관련된 우리 사회의 문제로 인식 지평이 확장됩니다. 결국 가까운 나라의 원전사고와 원전근처의 지진이 편협한 민주주의 의식을 확장시켰고, 경제발전 중심의 가치관에도 점차 문제의식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는 2017년 신고리 5, 6호기 공사여부에 대한 공론화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우리 사회를 보다 안전하고 생태적인 민주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로 보지 않고 우려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시민이 비전문가라서 안 된다는 겁니다. 사실 그간 많은 정책들이 전문가들로 구성된 무슨 위원회나, 국가권력, 기술관료들이 알아서 결정하면 끝이었습니다. 그 분야에 전문가들이니 잘 알 것이고, 그러니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결정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믿음은 한편으로 전문가들이 보여준 성과를 바탕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독재시절의 정치과정에 시민참여가 일상적으로 배제되면서 형성된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한 분야 안에도 다양한 진실과 다양한 입장을 가진 전문가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전문가 조직도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다양한 입장들이 포괄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고도의 전문성이라도 기술과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배제한 채 정책결정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일방적인 결정이 되고 그래서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전문가의 역할은 결정이 아니라 설명과 대안 제시입니다. 판단과 결정은 사회의 주체인 시민과 그 대표들이 하고, 다양한 전문가들은 이 결정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민주적 헌법 질서라고 봅니다.


안전하고 평화롭게 사는 방법은?
또 하나는 국회가 있는데 국민들에게 논의를 맡기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국회를 무시했다’는 주장입니다. 국회의 역할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그것의 핵심은 한국사회의 안전과 평화,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가 최고 목적입니다. 국회가 모든 논의를 독점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국회나 대의민주주의는 한국사회와 국민을 위한 수단이지 신성한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대의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의 과도한 비용과 현실적 조건 때문에 탄생한 제도이기에 사안에 따라 시민들이 직접 나설 수도 있고, 시대적 한계로 인해 지금의 상황을 민주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면 사회적 논의를 통해 그에 맞게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회는 국민을 위한 대표이기에 국민들이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국회의 목적에 더 부합하겠지요.


우리는 더 안전하고 민주적인 사회로 갈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허나 특별한 해결책은 없으며, 우리의 조건과 역량에 따라 그에 걸맞는 방법이 나올 뿐입니다. 이는 사회의 주체인 시민들의 ‘각성된 참여’ 없이는 발전도 도약도 없지만, 대의나 대표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참여하기도 힘든데 더 힘든 것은 이런 과정이 끝도 없으며, 우리가 한만큼 성과도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정상적인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운동에는 에너지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망할 것도 없고, 우리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면 계속 노력하고 참여하여 시민으로서 할 일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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