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용 건축이 보여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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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건축이 보여주는 것
  • 홍강희 기자
  • 승인 2019.07.0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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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군에 남긴 건축 30여점 전국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이유
무주군청·등나무 운동장·곤충박물관·주민자치센터 등 혁신
본부석 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앉는 스탠드에 그늘을 만들어주는 등나무 운동장. 정기용 건축가는 이 운동장이 전세계에 하나 뿐이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했다.

공공건축 혁신 해보자
전북 무주군에 가보니1

인구 2만4000여명의 작은 도시 전북 무주군에는 건축·도시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故 정기용 건축가가 10년 동안 남긴 30여점의 공공건축물이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 인구 83만7600여명의 도시 청주시에는 이름 난 건물이 없다. 구청, 경찰서, 복지관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특징이 없다. 이용자들의 편의를 무시하고 공장에서 찍어낸 듯 지어진 건물은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한다. 청주시의 공공건물도 일대 혁신을 해야 할 때가 됐다. 무엇이 사람들을 무주군으로 불러들이는지 보기 위해 지난 6월 15일 무주에 다녀왔다.

“나는 이 책을 건축가들이나 건축학도들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건축직·기술직 공무원들, 나아가서는 크고 작은 공공건축에 관여하는 모든 공무원들이 읽기를 바란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장인 시장·군수는 물론 지방의회 의원들도 주의깊게 애정을 가지고 읽기를 원한다. 그렇게 해서 농촌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방도를 찾고 지혜를 모으기 바란다.”

故 정기용 건축가의 책 ‘감응의 건축’은 이렇게 시작된다. 왜 공무원, 지방의원, 자치단체장이 읽어야 한다고 했을까.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니라 대중들이 사용하는 공공건축물에 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공공건축물은 대개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공공청사를 말한다. 도서관, 복지관, 주민자치센터, 경찰서 등 상당히 많다. 정기용 건축가는 공공건축에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건축을 공공서비스 측면에서 접근했다. 때문에 이용자들이 원하는 바로 그 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세웅 전 군수와 의기투합
 

그는 지난 1996~2006년 전북 무주군에서 군청, 등나무 운동장, 주민자치센터, 박물관, 청소년수련관, 종합복지관, 노인전문요양원, 납골당 등 30여점을 설계했다. 이 과정을 ‘무주 프로젝트’라 이름짓고 ‘감응의 건축’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을 보면 그의 철학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그는 지난 1996년 지인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어 도시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던 중 도시를 직접 가보기로 했다. 구미, 안동을 거쳐 무주를 방문했고 무주군 안성면 주민들과 만나 예술인마을 조성에 의기투합 했다. 결국 예술인마을은 못 지었지만 후에 김세웅 당시 무주군수를 만나면서 농촌에도 어울리고 군민들의 삶의 질도 높이는 건축을 하기로 한다. 이것이 10년 동안 이어졌다.

지금 무주군은 공공건축에 관한 한 꼭 가봐야 하는 곳으로 인식돼 있다. 지난 6월 15일 무주에 가서 무주군청, 등나무 운동장, 곤충박물관, 청소년수련관, 부남면 주민자치센터 등지를 돌아보았다. 정기용 건축가는 이미 사용하고 있던 군 청사를 편리하게 바꾸고 뒷마당을 숲으로 만들었다. 그는 “군청은 사람이 아닌 자동차가 모든 공간을 점령해 버렸다.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무주군청과 뒷마당을 혁신하면서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간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고 책에 썼다.

무주군청은 소박하지만 담이 없고 건물이 낮았다. 주변에는 차를 주차할 수 없다. 지하와 본청 옆의 차 쉼터라는 4층짜리 건물에 주차하도록 돼있다. 어느 청사를 가든 자동차가 빽빽하게 주차돼 있는데 이 곳은 달랐다. 뒷마당은 공원처럼 나무가 많고 아무나 쉬어갈 수 있도록 벤치가 있어 좋았다. 민원실과 본관, 군의회 사이에는 회랑이 있어 비나 눈이 올 때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된다. 충북도내 도청, 시청, 군청 마당은 지금 자동차가 점령했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걸어다녀야 한다. 무주군청을 벤치마킹하면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마당 북쪽의 계단식 단은 작은 무대로 활용되고, 3층 군수실 옆의 하늘이 보이는 작은 정원은 방문객이나 직원들에게 위안을 준다고 한다. 결재받으러 가는 직원, 면담하러 가는 외부인사들을 위한 배려였다고 한다. 김세웅 전 군수는 차도를 벽돌, 인도를 화강석 주먹돌로 교체해 무주 일원의 도시경관을 일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등나무 운동장은 과연 듣던대로 였다. 전세계에 단 한 개 밖에 없는 운동장, 자연이 주인공인 운동장, 작은 아이디어가 바꾼 운동장 이었다. 보통의 공설운동장은 가운데 본부석만 그늘이 있고 타원형의 스탠드는 뙤약볕에 노출된다. 그런데 이 곳은 운동장 주변에 등나무를 빙둘러 심고 등나무들이 잘 타고 올라가도록 구조물로 받쳐줘 자연스레 나무 그늘을 만들었다.

“군수만 본부석에서 비와 햇볕을 피하고 군민들은 땡볕에 서 있으라는 게 무슨 경우냐”는 한 주민의 핀잔을 듣고 김 전 군수는 운동장 주변에 240여 그루의 등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군수는 이를 정기용 건축가에게 상의했고, 건축가는 등나무 집을 지어 기가 막힌 등나무 운동장을 완성했다.

그러자 봄에는 보라색 등나무 꽃이 향기를 뿜고,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는 훌륭한 그늘을 만들었다는 것. 정기용 건축가도 무주에서 한 일 중 이것이 가장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무주군 관계자는 “이 운동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고 말했다.

 

목욕탕·천문대와 함께 하는 주민자치센터
 

반딧불 전통공예문화촌에는 등나무 운동장을 비롯해 지남공원, 예체문화관, 산골영화관, 반딧불체육관, 청소년수련관, 군민체육센터, 김환태문학관, 최북미술관, 문화원 등 문화·예술·체육 공간이 몰려 있어 좋았다. 군민들에게 휴식과 문화공간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곳이라 한다.

무주를 상징하는 곤충은 반딧불이다. 그 만큼 청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곳이 반디랜드다. 정기용 건축가는 이 곳에 곤충박물관을 지었다. 그는 “곤충과 식물이 공생관계이며 나아가서는 우주와 지구의 역사를 곁들일 때만 흥미로운 박물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곤충박물관은 건축물이라기 보다 풍경의 한 부분처럼 경사진 땅과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지었다고 한다. 박물관 주변에는 나무·꽃·물 등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해 관광객들로 넘쳤다.

그의 주민자치센터 건축 뒷얘기를 들어보면 공공건축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주민들이 원하는 것 혹은 그 마을에 꼭 있어야 할 것을 지었다고나 할까. 안성면 주민자치센터에는 목욕탕과 보건소를 결합한 건물을 지었다. 주민들이 “면사무소는 뭐하러 짓나. 목욕탕이나 지어주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알아보니 봉고차를 빌려 대전으로 목욕나들이를 가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는 주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시설을 수용했을 때 주민도 행복하고 관에서 일하는 사람도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바로 이런 것이 ‘건축이란 우리의 삶을 조직한다’는 것을 대변해준다는 것.

그는 적상산이 있는 적상면 주민자치센터에는 주민들이 오르내리는 램프 중간에 조선왕조실록의 기념비를 제작했다. 적상산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곳이다. 또 오지중의 오지인 부남면 주민자치센터에는 천문대를 지었다. 시골에 천문대라니 놀라운 상상력이다.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낯설게 서있는 주민자치센터와 복지회관을 기능적으로 연결해주고 부남면의 장소성을 새롭게 만들어줄 무엇인가를 찾던 중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고 착안했다고 한다.

실제 가보니 천문대는 주변 건물과 어울리며 소박했다. 금강 상류지역인 이 곳은 래프팅을 할 수 있는 관광지라 펜션도 여러 채 있다. 관광객들은 덤으로 밤에 별까지 보는 관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별지기가 없어 운영을 못하고 있다. 부남면 관계자는 “이 곳을 관리하며 별지기를 하던 직원이 그만둔 후로 사람이 없어 잠시 문을 닫았다. 아쉽다”며 “대신 별을 보려면 반디랜드 천문대로 가면 된다”고 말했다. 이 곳이 문을 열고 정기용 건축가가 보여주고 싶어하던 별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기용 건축가는 누구?
충북 영동생…노 전 대통령 사저, 기적의 어린이도서관 설계

 

사진/ 뉴시스

정기용 건축가는 충북과 인연이 깊다. 1945년 8월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 및 동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와 파리 제6대학 건축과를 졸업했다. 이후 프랑스 정부공인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파리 제8대학 도시계획과를 졸업한다. 그는 이렇게 공예·건축·도시계획 등 다양한 공부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성균관대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로 활동했다. 작품도 다수 남겼다. 계원조형예술대, 진주 동명중고등학교, 서울예전 드라마센터 리노베이션,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 영월 구인헌, 순천·제주·서귀포·진해·정읍 기적의 어린이도서관 등을 설계했다. 또 코리아나 뮤지엄 스페이스C, 파주 은하출판사, 파주 열림원,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마을 사저와 추모의 집, 지평선 중·고교와 지혜의 숲 도서관 등도 작업했다. 그 중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 기적의 어린이도서관,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가 유명하다.

제3회 교보환경문화상, 한국 건축가협회 우수상, 국민훈장 석류장 등 상도 많이 받았고 ‘서울 이야기’ ‘사람 건축 도시’ ‘감응의 건축’ ‘기적의 도서관’ ‘기억의 풍경’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한참 일 할 나이인 2011년 3월 66세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과 결별하기 전 마지막 여정을 담은 휴먼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감독 정재은)’가 지난 2012년 3월 개봉됐다.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세웅 전 무주군수의 전폭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 전 군수는 1995~2006년 군수를 세 번 역임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무주군 공무원들 중 정기용 건축가와 건축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외지인들에게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건축과가 별도로 없고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에서 작업을 그만둔 2006년 이후 공무원이 된 모 씨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10년이 넘은 일이라 그런지 동료들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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