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청주정신 뿌리찾기<2> 서원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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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청주정신 뿌리찾기<2> 서원향약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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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목사 율곡이 만든 지방자치규약의 효시 <김태하>
 서원향약(西原鄕約)은 조선시대의 대유학자인 율곡 이이가 1571년(선조 4년)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그해 가을에 제정한 것으로 우리나라 향약의 표본으로서 전통의 미풍양속을 계승하고, 악한 것을 경계하는 등 지방자치 정신을 북돋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공원 한 복판 망선루 서쪽으로 세운 커다란 오석(烏石)에 서원향약을 기록한 비(碑)가 있다.

최근 산업발달과 경제발전은 눈부시게 이루고 있지만 훈훈한 인심과 전통의 도덕규범 등 미풍양속은 사라지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1993년 4월 10일 청주시에서는 서원향약에 담겨진 숭고한 도덕성과 공동체 정신의 맥을 이어 살기 좋고 아름다운 청주를 가꾸고자 이 비를 세운 것이다.

 향약은 지방자치단체의 덕화(德化) 및 상호협조 시책으로 만든 규약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시행되었는데 그 모체는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이었다. 여씨향약은 북송(北宋) 말에 여씨 문중에서 도학으로 이름을 떨친 4형제가 일가친척과 향리 전체를 교화하고 선도하고자 마련한 것이다. 여씨향약은 4조로 된 것이다.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 그것이다.

조선에서 여씨향약을 참작하여 당시의 풍습과 민정에 알맞은 향약을 만든 대표가 퇴계와 율곡이다. 퇴계는 고향 선배 이현보(李賢輔)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예안향약(禮安鄕約)을 만들었고, 율곡은 서원향약을 만들었다.

   
▲ 서원향약비
서원향약은 양반과 천민을 구별 않고 청주 지방의 전체 백성을 대상으로 입약(立約) 실시하였다. 여기서 율곡은 계형식을 빌려 도계장, 계장, 동훈회, 색장 등의 임원을 두고 향촌계를 만들었으니 오늘날 지방자치의 정신과 같다.

서원향약에서는 선악(善惡) 두 편을 만들어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세칙을 규정하고 있다. 그 주된 내용은 선에 관한 사항으로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가정을 다스리는 일, 친척간의 화목, 유행에 의한 처신, 의리에 의한 자녀 규제, 청렴 절개의 고수, 은혜를 널리 베품, 근학, 세약의 각근, 약속 이행, 신용이행, 싸움 화해, 환난시 조력, 명확한 시비 판단 등이며, 악과 관련된 사항으로는 불효, 불자, 불우, 불제와 스승에의 불공, 부부간의 무분별함, 정처에 대한 소박, 신의의 상실, 제사의 정성 부족, 예법 무시, 미신 숭상, 가족간의 불화, 이웃간의 우애 상실, 도박 음주에의 탐닉, 송사를 즐기는 일, 약자에 대한 냉대와 무시, 납세의 등한시, 예법 준수의 무시, 공공의 일을 빙자하여 개인의 이익을 꾀함, 음식을 마구 먹음, 태만으로 대사를 그르치는 일 등이다.

율곡 이이(李珥, 1536 - 1584)의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 시호는 문성(文成), 찰방 벼슬을 한 원수(元秀)공의 아들, 어머니는 강릉인 사임당이다. 강릉 출신으로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익혀,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16세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허무를 통탄하다 3년상을 치른 다음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1년만에 집으로 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고, 1558년 당시 이름을 떨치던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니 이황은 그의 재능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별시에 장원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9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그후 율곡은 여러 요직을 거쳐 1581년 대사헌,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을 지냈으며, 이듬해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율곡은 1564년 호조좌랑에 초임하였고, 1571년 (선조 4년) 6월 36세로 청주 목사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청주 목사로 부임한 이듬해   3월 의병(依病)으로 사임하였다. 그의 청주 목사 재임 10개월간은 짧았으나 그가 만든 서원향약은 만인의 귀감이 되어 사람을 교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청주 목사에서 사임한 율곡은 해주와 석담에 낙향하였을 때, 해주향약(海州鄕約)과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을 제정 실시하였는데, 이 때 예안향약(禮安鄕約)은 물론 여러 향약을 근본으로 삼고, 지방 실정에 맞게 가감하였다. 율곡의 향약 영향은 대단하여 숙종 이후 영조, 정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사용한 향약은 대부분 율곡의 향약에 의하여 된 것이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은 향약의 기능이 활발할수록 부정행위를 할 수 없었던 관계로 향약의 성장을 억제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에 향약이 사라지게 된 원인의 하나가 거기에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패상을 보면서 정신적 기둥을 어떻게 세워야 할까 생각해 본다.  <김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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