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생 신화' 20년 충북출신 장종훈 선수 은퇴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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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생 신화' 20년 충북출신 장종훈 선수 은퇴 소감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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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나갈 때 가장 많이 많았죠' 코치로 변신<한겨레신문>

   
▲ 한겨레 신문 펌
<한겨레신문 펌>은퇴를 발표한 지난 15일 저녁, 9살 난 큰 아들이 만원권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리곤 “아빠, 사고 싶은 거 사세요”라고 말했다. 선수를 그만두면 할 일이 없어지고, 돈을 못 번다고 여긴 아들은 아빠가 걱정스러웠나 보다.

프로야구 ‘연습생의 신화’의 원조 장종훈(37·한화)의 앞머리에 흰서리가 내렸다. 19살 청년 때 프로야구를 시작한 그는 어느덧 중년 길목까지 와 있었다.

장종훈은 1986년 연봉 300만원의 연습생으로 빙그레 이글스(옛 한화)에 입단했을 때 딱 1년만 더 야구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는 야구를 잘하지 못했어요. 1년 더 해보고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는 빨래줄 같은 홈런포를 날리며 ‘인생역전’의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3년 연속 홈런왕(1990~92년), 15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등의 대기록을 남긴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연습생 신화라는 말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곧 자부심이 생겼다. “아는 분이 대학진학을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단순히 졸업장 따러 대학 가는 거라면 안 가겠다고 했어요.”

장종훈은 초등학교 때 유도 선수가 될 뻔했다. 충북 영동 이수초등학교(현 용담초등)에 다닐 땐 덩치가 좋아 유도를 했다. 별명이 ‘돼지’였다. 어느 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야구부 선수들의 모습이 멋있어 야구를 시작했다. 배트를 처음 잡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는 야구하는 것을 무척 싫어 하셨어요. 하지만 야구를 꼭 하고 싶었어요.”

‘걸어다니는 기록 제조기’ 장종훈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기록은 무엇일까? 최다 경기 출장(1949경기) 기록이다. “처음에는 홈런기록(340개)이 가장 좋았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최다 경기출장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지 알게 됐지요.” 야수는 투수와 달리 경기 때마다 출장해야 하기 때문에 힘겨울 때가 많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연속경기까지 치를 때면 경기장에 정말 가기 싫었다. 그가 세운 통산 1위 기록은 모두 9개. 이 가운데는 삼진(1353개)도 있다.

장종훈은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특별히 왼손타자를 꼭 해보고 싶단다. 그는 타자로서의 감각과 힘을 타고 났다. 전성기 때 때리는 홈런은 포물선보다는 직선에 가깝게 날라 갔다. “어렸을 때는 선배들이 저하고 타격 연습하는 게 싫다고 했어요. 공을 맞히는 소리부터 달라서 기가 죽는다고.” 한참 잘 나갈 때는 몸에 맞는 공도 많았다.

“3년 연속 홈런왕 할 때 3년 연속 몸에 맞는 공을 가장 많이 맞은 선수였어요. 하하하….” 장종훈이 은퇴를 발표한 뒤, 등번호(35번) 영구결번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싫다고 말했다. 적어도 한화에서 코치를 할 때까지는 번호를 그대로 갖고 있고 싶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이 들었다. 입단 뒤 한 번도 옮긴 적 없었던 라커를 코치실로 옮길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날 만큼 서운하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이 풍운아는 아직 은퇴가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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